하늘가에 산허리가 금을 긋고 있다. 하늘과 구름과 산이 맞닿아 있는 곳, 그 공간에 이따금 새가 질러가곤 한다.
차분히 가라앉는 시간이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의 썰렁한 밤기운이 뫼밭에 가득하면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지는 듯하다. 어디선가 화두(話頭) 하나 날아든다.
“너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회사를 그만두기 1년 전쯤의 일이다. 서울 모처에 은신하고 있던 용하다는 점쟁이를 직장동료들과 함께 찾아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만약 여행을 간다면 뉴욕과 같은 번화한 대도시를 가겠습니까? 아니면, 몽고와 같은 대자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까?”
“글쎄요…”
“내 생각 같아서는 몽고 쪽을 택하실 것 같은데….”
나는 그때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은퇴하시고 집 옆 공터 돌밭을 일구어 50평 남짓 텃밭농사를 지으셨다. 여름방학 을 맞아 집으로 내려오면, 땀에 흠뻑 젖어 호미질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뇌종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시간이 당신께는 가장 행복하신 때였다. 5남매 모두를 대학까지 가르치고자 했던 고된 임무로부터 해방돼 온전히 당신 스스로에게만 일상을 소비할 수 있었던 하루하루 천금 같은 시간들이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끔, 목에 수건을 두르시고 일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젊을 때부터 그렇게 살면 안 될까?’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치열한 경쟁논리와,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는 획일적인 분위기, 오로지 성과만 낳으면 된다는 성과제일주의 속에서 그 점쟁이의 말대로 21세기 세계화의 첨병 역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매번 술로 풀어야 하는, 삶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소모적인 일은 더 이상 하기 싫었다. 돈벌이를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까지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성과가 되어 생활비가 마련되는 어설픈 삶이 싫었다.
이 세상 미물로 태어난 이상 하루하루 전쟁 아닌 삶이 있겠냐마는 그 전쟁의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고 몸 가는 대로 머리가 가고, 몸을 움직여 노동의 대가로 먹을거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자립적이고 능동적인 삶이 필요했다. 복잡한 것도 싫고, 많은 것도 싫고, 바쁜 것도 싫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단순하고 담백하게… 하여간 어디 쫓기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농부의 삶. 자연에 몸을 맡긴 채, 거친 노동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고 양식을 만들어 내는 그런 삶. 누군가는 3대가 무식할 각오를 해야 농촌으로 갈 수 있을 거라 했지만 가족들을 위해 건강한 먹거리를 스스로 창조하는 농부의 삶이야말로 기실 임금님도 부럽지 않은 삶이 아니겠는가.
결국 2005년 봄, 아내를 설득해 함께 서울의 어느 귀농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을 수료할 무렵, 회사에 사직원을 냈고,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에 회사를 관두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옥천의 대청호 주변 마을에 논 댓 마지기를 세 얻어 귀농실습에 들어갔으며, 1년 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영동 학산의 산골 마을에 마침내 들어서게 됐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의 저서 ‘소로우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물음은 우리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가장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이곳(월든)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면, 곧 어떤 일인가를 이루어 내고 싶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제안대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추위와 굶주림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소로우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모든 사람에 있어 인생의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나로서는 시골에서 살겠다는 기왕의 결단이 그 해답이 될 수 있길 빌 뿐이다.


김 철
1968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다 자연과의 공생과 노동을 통한 삶의 균형을 찾고자 2007년 충북 영동으로 귀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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