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백종수 기자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과 한국양록협회는 4월 3일을 ‘사슴 데이’로 정했다. 이들 기관과 단체는 몇 년간의 논의를 거쳐 사슴의 날을 정하고 올해 처음으로 사슴고기와 국산녹용 소비촉진행사를 서울 명동 모처에서 벌였다. 수입산이 국내시장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필사의 자구책으로 이해된다.

농업계는 농산물 소비촉진을 위해 축종이나 작물별로 ‘기념일’을 정해 판촉활동에 학술대회까지 벌여왔다. 3월 3일은 3이 겹치는 날이라고 ‘삼겹살 데이’, 9월 9일은 닭이 구구 울어댄다고 ‘닭의 날’, 5월 2일은 발음을 따다 ‘오이 데이’ 또는 ‘오리 데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른바 ‘데이 마케팅’(day marketing)이다.

이 같은 ‘데이’니 무슨 ‘날’이니 정하는 것에 대해 발상이 기발하다는 평도 있고 우리 농산물 소비촉진을 위한 충정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기자는 지난 3월 3일에 “오늘은 삼겹살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

기발한 것도 좋고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운 날을 택하는 것도 전략이다. 아울러 기념일을 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며 실질적인 소비촉진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사슴농장 전화번호에 가장 많은 게 ‘사삼(43)’이라고 한다. 끝자리 번호가 ‘4343’인 경우다. 그래서인지 4월 3일을 ‘사슴 데이’로 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일리 있고 명분도 그럴싸하다. 이삿짐센터 전화번호에 ‘2424’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날’을 정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4월 3일 ‘사슴 데이’가 그렇다. 이날은 4·3 제주항쟁 기념일이다. 1948년 4월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 날에 제사가 있는, 가슴아픈 역사가 있다. 한때 이들 희생자를 좌익으로 모는 역사왜곡도 있었지만, 반세기가 지나면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참여정부에서는 대통령이 몸소 위령제에 참석해 ‘국가를 대표해 사과’하기도 했다. 올해는 60돌을 맞이했다.

‘사슴 데이’를 재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슴을 키우는 농가에겐 ‘트집’이 될 수도 있으나 역사의식이 결여됐다는 생각이다. 하필 ‘이날이 그날이냐’며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날’을 피해 ‘사슴 데이’를 정하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광주민주화항쟁기념일인 5·18을 ‘오일 팔아주는 날’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로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비견될 만하다. 11을 한자로 써 세로로 붙이면 흙토(土)가 된다. ‘농업인의 날’ 발상지인 강원 원주의 농촌지도자들은 ‘흙(土)에서 나, 흙(土)에서 살고, 흙(土)으로 돌아간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매년 11월 11일 11시에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한 30년 흐른 1990년대 중반에야 대통령이 정하는 국가기념일로 자리잡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빼빼로 데이’와 사투를 벌이는 국가기념일이 됐다.

수입산이 국내시장을 위협하는 처지에서 우리 농축산물 소비촉진을 위해 ‘날’을 정하는 일은 나무랄 것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극적인 판촉활동의 일환으로 ‘날’을 정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식과 철학이 함께 스며든 ‘날’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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