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관련 기사 쓰면서 땅을 아끼고 탐낸 우리 조상들 생각을 많이 해 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경영과 국민생활은 거의 농업에 의존했다. 제대로 가동되는 공장이 거의 전무했다.

국민의 90%가 농촌에 발을 붙이고 땅을 일구며 가꾸며 살아야 했다. 따라서 농민들의 땅 늘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과 경쟁은 참으로 치열했다.

50∼60년대 심지어는 70년대 초반, 수리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가뭄이 심하면 물꼬싸움으로 살인까지 하는 끔찍한 사건기사를 신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식량자급이 되지 않아 하루 세끼 밥먹기가 힘들었다. 점심에 죽 먹는 것도 힘들었다.
따라서 가뭄시 물꼬싸움은 비일비재했다.

이 당시 작고하신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이다. 고향에서 논 두어 마지기를 갖고 있던 친척 할아버지는 7남매 모두를 대학공부 시키고도 논을 100여 마지기까지 늘렸다.

이 할아버지의 땅 늘린 일화 한 토막이다.
십여리 장에 갔다가 용변 볼일이 있으면 꾹 참고 반드시 자신의 농토에 와 용변을 보셨다고 했다. 비료가 없던 시절 인분이 귀한 거름이었기 때문이다.
엄동 겨울이 닥치면 할머니를 처가, 즉 친정에 보내 봄에 불러들였다고 했다. 한 식구 양식 줄이면 땅이 늘기 때문이었다.

보릿고개 식량이 완전히 고갈됐을 때엔 신문지상에 보리농사 작황 르포기사가 사회면 톱기사가 되기도 했다. 물이 귀한 시절 뜨거운 대낮 햇살 아래선 용두레로 물 푸기가 힘들었다.
시원한 밤 할아버지 내외는 달빛 아래에서 용두레로 물을 푸며 농사를 지어야 했다.
휘영청 달 밝은 밤, 물 푸기 하다 틈틈이 쉬며 자식농사도 짓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땅 늘리기에 사생결단의 노력을 다했다.

정부도 농업진흥, 식량자급에 힘썼다.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자급에 총력을 쏟았다.

밥맛은 없지만 수량이 두 배가 넘는 통일벼의 육종 확대에 비상한 노력을 다했다.
통일볍씨 육종 및 세대 단축을 위해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에 인공기상실을 건축해야 했다.
이 기상실 건축에 조바심이 난 박 대통령은 경제부총리와 농림장관에게 수시로 건축상황을 체크했다. 한편 권농일을 제정해 매년 모심기에 나서서 권농과 식량증산을 진두지휘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 농민을 모아 우수 농민을 표창한 뒤 육영사 여사와 함께 단상에 앉아 독농가의 영농성공담을 들었다. 이 사례발표는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성공담을 듣다 감동을 받은 대통령 내외가 손수건 꺼내 눈물을 닦는 장면도 보였다. 이렇게 일군 농업발전에서 쉽게 손을 떼서는 절대 안 된다. 더구나 도시 투기꾼들에게 쉽게 농지를 내놓아선 안 된다. 농지 늘리는데 지혜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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