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가장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다. 굶주림은 곧 죽음이다.

식량의 산지(産地)인 땅을 가져야 살아 남기에 국가간 전쟁은 땅뺏기로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은 산업화로 인류가 필요로 하는 물재를 국가간에 분담·생산하기 때문에 땅을 탐내는 전쟁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지금은 석유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6.25한국전쟁은 식량 얻기, 결국 땅뺏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필자는 서울 청와대 인근 통의동에서 출생해 인왕산 초입 언덕에 있었던 매동초등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을 맞았다.

6월25일은 일요일이었다. 당시 방역시설이 부실해 여름이면 학질과 뇌염발생이 심했다. 낮잠이 들면 어머니가 학질 또는 뇌염이 걸리지 않았나 깨워 확인하느라 낮잠 자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낮잠 자고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수상치 않더니 전쟁이 났다고 했다. 저녁나절 되니 비가 쏟아지면서 솥단지와 짐꾸러미를 이고 진 피난민이 보였다. 밤이 깊어지자 총성이 크게 들렸다.

아침에 비가 개인 뒤 아버지 손에 끌려 중앙청 앞에 나가보니 지프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죽어 누워 있었다. 이어 세 바퀴 오토바이가 앞장선 북한 인민군들이 입성했다.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서러운 배고픔에 시달렸다.

인민군들이 우리집 쌀 6가마니를 빼앗아갔다. 전쟁이 발발하니 교통도 전면 차단됐다. 논밭이 없던 서울도심에서 북한군에게 식량을 몽땅 뺏기고 먹거리를 구하지 못했다. 당시 집에 있던 재봉틀, 유성기, 패물을 팔아도 쌀 한말 바꾸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가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왕십리 배추밭에 나가 푸성귀를 주어 우거지 죽을 끓여먹는 게 호구책이었다.
전쟁이 심해져 동대문 나가기도 힘들어지자 어머니는 인왕산에 올라가 아카시아 잎사귀를 따다가 물에 담가 독기를 뺀 뒤 된장·간장으로 무쳐 먹기도 했다. 이런 혹독한 굶주림의 참상은 잊을 수 없다.

국민 생존을 지키는 유일한 보루는 땅이다. 땅을 지키는 일과 그 땅을 알뜰하게 가꿀 정예농민 육성이 농정의 최대 역점과제가 돼야 한다.

세계는 지금 식량과 종자전쟁을 통해 식량마련에 혈안이 돼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귀중한 농지가 유효하게 활용되는 작부도입과 기술수용에 힘써 농업보국의 의지를 다해야 한다.

최근 출장기회가 잦아 1원짜리 씨앗을 중국에다 500원을 받고 파는 종자전쟁의 승자를 만날 영광도 있었다. 허브라는 생소한 식물로 관광객을 끌어들여 허브향료, 비누, 심지어 음식까지 팔아 하루 수 천만원을 버는 스타농군 얘기 들었다.

칠레산 포도의 수입으로 우리 포도농사가 궤멸한다는 예상을 뒤엎고 동남아와 미국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도미 길에 오르는 성공 농민도 만났다.

농지 참으로 소중한 공간이다. 또 재테크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경기가 침체하고 있다. 우리 농민이 국가 성장동력의 주역이 돼야 한다. 농지를 잘 가꾸고 슬기롭게 지키자.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라 발전의 동력을 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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