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옵니다.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까지 쉼 없이 옵니다. 우리말에는 비의 종류가 무척 많습니다. 안개비, 는개,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 실비, 장대비, 여우비, 억수, 웃비, 단비, 바람비 등 한자어까지 더하면 50여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어느 해인가 하도 비가 안 와서 비타령 한답시고 그런 비의 종류를 외운 적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중얼거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로지 비에 기댄 농사짓던 조상 농민들의 예민함이 그토록 다양한 비의 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는 비에 따라 해야 할 일 또한 다르니 일과의 지표도 되어주었을 것 같습니다. 현대에 사는 저로서는 그런 감각이 무뎌져 마침 오는 비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군요.


 “오늘 비는 뭐라 불러야 할까?” 제가 비 이름을 죽 외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더니 엉뚱한 답이 날아옵니다. “들깨 베야 하는데 앞으로 며칠은 글렀네.” 그러지 말고 답해보라고 재우쳐 물었더니 얄미워서 여우비라고 합니다.

저는 “땡” 하고 외친 다음 맑은 날 잠깐 내리는 비가 여우비라고 하니까 대뜸 그건 호랑이비라고 우깁니다. 예전에는 그런 날 있으면 호랑이 시집가는 날이라고 했으니 호랑이비라는 것이죠. 호랑이비는 비 족보에 없다고 해도 고집을 부립니다.


“어쨌든 지금 내리는 비를 알아맞히라니깐.” 외등을 켠 다음 창을 연 아내가 다시 읊어보라고 합니다. “이슬비다.” “안개도 끼었으니까 안개비 아닌가?” “안개는 안개고 비는 비지.” 맞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안개비와 이슬비 사이의 는개 같다고 하니까 그건 또 뭐냐고 아내가 묻는데, 는개가 무슨 말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어디서 보니까 안개가 맺혀 늘어지며 떨어지는 듯 오는 비를 는개라고 한다더군요.


 “지난 해 호스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 받던 생각나네.” 아내가 여름에 덮던 이불을 개키며 이럽니다. 가뭄이 극심했었죠. 타들어가던 고추 살리겠다고 밤새 받은 물을 이랑에 구멍 내고 고이고이 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받던 물이 비 오기 전까지 그만큼씩은 마르지 않고 나왔습니다.

“2톤짜리 물통 안 털고 버텼으니 장한 일이었지요.” 그 물 두고 아내와 많이 다퉜습니다. 저는 쓰자고 덤볐고, 아내는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고 막았었습니다. 그때는 꽤나 절박했겠는데, 겨우 한해 지났는데도 이제는 무덤덤합니다.


 아내는 개킨 이불을 다락에 넣으라고 하고는 시내 집에서 가져온 약간 두툼한 이불을 여름 것 대신 펼쳐놓습니다. 아내의 첫 가을맞이입니다. 저 이불이 줄 온기가 덮기도 전에 느껴지는데 갑자기 출출해지는군요. “어, 뭐, 칼국수라도 한 그릇 하면 좋겠네. 비도 오는데 말이야,” 워낙 자잘한 일이 많으니 노곤하여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던 아내도 눈이 말똥말똥 합니다.


“라면이라도 먹을까?” “그러자.” 제가 끓이기로 합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제가 요리는 못해도 라면은 그럴 듯하게 익혀 냅니다. 주방 쪽으로 가니 웬걸 개수대 가득 그릇이 쌓여 있습니다. 설거지 먼저 해야겠군요. 주섬주섬 설거지에 나서자 아내가 말립니다. “대파나 뽑아와.”


 거품 이는 수세미로 그릇을 닦으며 먹은 것들을 돌이켜봅니다. 이 접시는 김치, 저 국그릇에는 된장찌개, 저 종지에는 고추장아찌... 두 끼 먹은 그릇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끼니 건너뛰고 거르기가 늘 다반사였는데, 요즘 우리 부부는 하루 두 끼는 꼭 챙겨 먹습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산에 들어갔다가 청솔모의 밥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도 밥상을 지키자고 다짐했거든요. 모든 게 다 ‘밥심’ 인 걸 알면서도 허기질 때까지 일에 매달려 왔던 것을 반성했습니다. 장모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배고픈 건 서러운 거예요.” 사는 게 서러우면 배불리 먹으면 낫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무렴 그렇습니다.“와, 찾았다.”아내가 냉장고에 묵혀둔 칼국수를 발굴해냈군요. 진 빠진 칼국수 맛은 어떤지 먹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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