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아침부터 시큰둥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내가 부어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난밤 일 하느라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던 아내에게 빨리 자라고 한마디 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아내는 올해 이미 실패한 토종 증식 목록을 작성하던 중이었거든요. 안 그래도 자책 중이던 아내한테 쓸데없는 일 그만하고 자라고 했으니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바탕 제 탓을 하고 나서 벽에 이마를 대고 돌아누웠던 아내였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이미 벌어진 일’ 인데 그래 봐야 기분만 더 상한다고 충고를 했더니 발딱 일어나 앉으며 외치더군요. “진행 중이거든!” 뒤이어 남의 말 가져다가 쓰려거든 앞뒤 살펴서 하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아내가 애용하는 말입니다. 고라니에 콩 뜯겨 약올라 하거나 한발 늦어 세찬 비 오고 나서야 봉두난발 한 고추 추스르며 애석해할 때 아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취지로 그럽니다.

가끔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는 용도로 쓰기도 해서 얄밉기는 해도 그 대범함이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듣게 되니 저도 화가 났습니다.

우리 부부가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드문데 사소한 일에 신경 곤두세우지 말라는 게 화날 일이냐고 따졌습니다. 그 사이 아내는 토종 돌보는 일이 쓸데없고, 사소한 일이냐고, 그렇게 생각하냐고 반격을 해오더군요. 괜한 시비로 잠 잘 시간만 축나게 생겼다는 생각에 외마디 전법을 썼습니다.

“자자!” 쉬 잠이 오지 않아 토종 증식 실패 사유를 곱씹어 보는데 떠오르지 않습니다. 메모를 뒤적거려도 빠져있군요. 그 일이 그 일 같은 농사 되밟아 가다가 꿈길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아내가 화를 풀지 않습니다. 저는 저대로 이미 벌어진 일과 진행 중인 일을 입맛대로 정하며 자책의 악순환에 빠져든 아내가 탐탁지 않습니다. 함께 고추밭에 갔으나 일은 따로 합니다.

고추 따는 아내를 가로질러 가며 부쩍 자란 고추에 한 줄 더 띄웁니다. 어깃장이죠. 그러다가 난관에 봉착합니다. 아내 손을 빌려야 줄을 띄울 수 있는 구간이 나옵니다. “저기 좀 잡아줘야 줄 띄울 거 아냐!” 묵묵히 잡아주는 아내가 한마디 거듭니다.

“액비부터 줘야 할 것 아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은 틀렸습니다. 나은 게 아니라 안 그러면 일이 안 됩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덕분에 아내와 저 사이에 끼었던 살얼음이 살살 녹습니다.

“고추 실하고 좋다.” “첫물이라 그렇지, 뭐.” 날도 고르지 않았는데 고추가 만족스럽습니다. 고랑에 퍼질러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뿌듯했더니 아내가 새치름하게 바라보며 복기를 합니다. 늦은 감자 캐기와 제 파종 만류로 때를 놓쳐 포기한 토종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워낙 자투리 시간을 알뜰히 활용하려는 의지가 강해 일이 질정 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어 제가 자주 말립니다.

그러니까 주 작업 하기에도 벅찬 노동환경이 원인인 셈입니다. 주 작업 공간과 시간을 잘 안배해야 아내의 토종 사랑을 만족스럽게 구현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부부지간의 사소한 다툼은 언제나 상대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아전인수식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도매금으로 무관심을 불화의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자리한 배려의 폭과 깊이가 야박해서 그렇습니다.

무관심은 결과일 뿐이고 기만적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없었던 일이 아닌 것과 다름없는 경지입니다. 다음 작기에는 반드시 아내의 관심을 만족할 수 있게 개선해야겠습니다. 말이나마 그러니 다행이라는 아내에게 한마디 합니다.

“응, 그래야 내가 안 시달리니까.” “흥, 그래서 여태 배추 심을 자리 마련 안 하고 계시나?” 벌써 때가 왔군요. 아니, 이미 늦어지고 있다는군요. 진작 마련해두었던 밭에 거름치고 덮고 심기만 하면 되니까 일도 아닙니다. 토종 배추는 올해도 포기한다는 아내 말이 제 가슴을 후벼 파는군요.

“아주 입이 보살이야!” 제 가슴은 돌멩이라 귀지 파듯 패일 리 없다고 놀립니다. 장모님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배차는 던져놔도 잘 자라던데요.” 아내가 깔깔 웃고 저는 쓰게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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