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아내에게 고하고 호스를 대어놓은 개울로 향합니다. 가뭄 때문이 아니라서 한결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아마도 지난 태풍에 내린 큰비로 불어난 물에 호스 끝이 흙에 파묻혀 물이 끊겼을 것입니다. 아니라면 호스 이음새에 가재가 끼어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언덕길을 오르자 낯익은 오동나무가 나타납니다. 나이가 꽤 들기는 했어도 한 해 사이 둥치가 더 굵어지고 가지는 품이 더 넓어지고 키도 더 큰 것 같습니다. 그 그늘을 지나 턱을 내려서면 개울입니다. 철철 물 흐르는 소리가 납니다. 근래 듣기 어려웠던 물소리입니다.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개울 건너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예의 그 싸한 산의 살 내음이 풍깁니다. 폭신한 낙엽을 밟자 가볍게 바람이 이는 듯합니다. 개울 거슬러 오르기 전에 반반한 돌멩이에 털썩 앉아 전화를 꺼내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뒤따라 오지?” “왜? 나, 바빠.” 아내가 전화를 뚝 끊는군요. 아내는 고추밭 손보고 있겠습니다. 아내와 말갛고 촉촉한 산 기운을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엊저녁에 길가에 핀 달맞이꽃을 보고 가을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했더니 아내는 숲에서는 버섯이 일어서겠다고 대꾸했었습니다. 둘러보니 이른 버섯도 다문다문 보입니다. 고작 십여 분이 아까워 함께 오지 않아 아쉽습니다.

언제고 갈 수 있는 숲이고 산인데 함께 들지 못하는 뒷산이군요. 어쨌거나 싱그러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작은 웅덩이에서 파묻힌 호스를 끄집어내어 구멍을 틀어막은 흙덩이를 털어내자 금세 물이 빨려 들어갑니다.

아내 말대로 올해는 덤바우가 물 부자입니다. 지난 3년은 칠팔월 가뭄에 헐떡였거든요. 다시 바위에 앉아 물소리나 듣다가 내려가자 마음먹었는데 늘 앉는 바위를 지나쳐 그냥 내려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추밭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득달같이 말합니다. “개울에만 가면 함흥차사야.” 산그늘과는 달리 밭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밤새 식지 않은 열기를 흙이 훅훅 뱉어내는 것 같습니다.

“혼자 줄 띄울 수 있지?” 제가 발견한 신기술로 고추 줄 띄우기는 혼자서도 잘 합니다. “원래 혼자 하는 일이야. “어련하실까? 쉽게 금방 한다고요. 근데 어디 가게?” “응, 돼지 파 구하러 가.”

“근데, 액비부터 주고 나서 줄 띄울게.” 돌아서는 아내의 뒤에 대고 허락을 구합니다. “그러시던가.” 아내와 달리 저는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아내와 의논합니다. 아내는 책임지기 싫어서 그런다지만 사실은 아내와 호흡을 맞추려고 그럽니다.

오히려 책임감이 더 생기고 일과에도 절도가 있어 탄력이 붙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알아서 일을 나누는 것은 별로 재미없습니다.

신이 나지도 않고요. 아내는 슬그머니 저해야 할 일을 소문 없이 하는데, 제 마음에는 안 들어도 문득 아내 손길이 간 곳을 발견하면 흐뭇해지니 시비 걸 일은 없습니다.

아내도 제가 하는 일마다 고하고 허락도 일일이 맡는 게 싫지는 않은 눈치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러거든요. “시시콜콜 물어가며 해야 해?”


 고추밭이 온통 붉으락푸르락합니다. 벌레와 병치레가 거의 없어 올해는 기대가 큽니다. 농사는 유독 끝나봐야 끝인 줄 아는 일이지만, 8월 이맘때쯤이 이러니 당장은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억척같은 풀에서 돼지 파를 구하고 돌아온 아내가 검정팥 몇 포기가 절로 나서 잘도 자랐다고 기뻐합니다.

밭 둔덕 풀에 치여 시르죽었을 거라던 엉겅퀴도 꿋꿋하다면서 흐뭇해하고, 정체 모를 녀석이 뿌리를 다 갉아 거의 사라졌던 삼채가 틀밭 가득히 되살아났다는 소식도 전합니다. 그리고 무슨 비밀 알려주듯이 넌지시 귀띔합니다.

“상사화 피었거든.” 고추 줄 띄우기에 진력이 났던 제가 밥 먹기 전에 함께 띄워 마치자고 했더니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총총 가버립니다. 따지고 보면 하찮은 것들인데 덤바우에 터 잡고 살아남은 것들, 그리고 슬쩍 뿌려둔 것들의 흔적을 탐색하는 게 아내는 즐겁습니다.

덕분에 저는 밭을 갈거나 예초기로 풀을 벨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아내 말에 따르면 그런 일 하다가‘해 먹은 게’ 하나둘 아니라는군요. 아내에게는 보물인 게 제게는 지뢰밭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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