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지간에 ‘여보’ , ‘당신’ 이라고 부르는 게 상식이지만, 저는 아내를 아내의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부릅니다. 아내도 그렇게 합니다. 남들에게도 ‘씨’ 를 붙여 아내의 호칭으로 삼습니다. 아내도 그럽니다. 귀에 익어서 그런지 마을 분들 역시도 저나 아내 이름에 ‘씨’ 를 붙여 부릅니다. 부득부득 아내를 서울댁이라고 부르던 할머니도 언젠가부터는 ‘씨’ 를 붙여 불러주십니다.

마을의 저보다 젊은 농민이 부부가 서로 이름을 불러주니까 연인 사이 같아서 듣기 좋다더군요. 그러면서도 왠지 격이 있어 보인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격이야‘여보, 당신’ 호칭에도 있는 것 아니냐고 아내가 대꾸했습니다.

젊은 농민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뜻으로, 아내는 자격의 뜻으로‘격’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습니다. 자격이든 거리감이든 역할의 차이를 호칭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다름없겠습니다.


 감나무 두 그루를 심던 날이었습니다. 아침까지 거르고 일찌감치 묘목을 들고 아내가 선정해둔 밭 둔덕으로 갔습니다. 때 이른 더위가 며칠째 이어져 아침부터 해가 뜨거웠습니다. 그 탓에 건조해진 땅에 꽂는 삽날이 퉁퉁 튕깁니다. “그러게 가져오자마자 심어야지.” 이틀이나 내팽개쳐둔 두었던 감나무가 잘 살지 모르겠군요. “난 감 안 좋아해.” 제가 툴툴거리자 아내가 즉각 답합니다.

“댁 드시라고 심나?”다행히 속살은 부드러워 구덩이 두 개를 큼직하게 팠습니다. 잠시 쉬는 참에 밭 옆으로 늘어진 산을 보았더니 흰 꽃이 핀 나무가 보입니다. 함박나무 꽃을 닮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아내를 부르며 물었더니 아내가 뜬금없는 소리를 합니다.

“가끔 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서러울 때가 있어.” 아내 사전에 없는 낱말,‘서럽다’가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잔뜩 긴장됩니다. 아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 사람들은 장모님을 아내 이름에‘엄마’를 붙여 불렀다고 합니다. 자신은 둘째인데 첫째는 놔두고 왜 자신의 이름에다 엄마를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희미하게 웃습니다.

“중학교 때인가? 마을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를 부르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서러웠어, 이유도 없이. 방금 근우씨가 나 부르는 소리 듣고 그때처럼 서럽더라고.”위로의 말이 필요한 순간인데, 아무런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저 벌떡 일어나 퇴비 쌓아둔 곳으로 가서 한 포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그 사이 아내는 산비탈의 흰 꽃이 핀 나무들 곁으로 가 있군요.


 구덩이 바닥에 시꺼먼 퇴비를 두툼하게 깔고 그 위는 썩은 낙엽으로 덮었습니다. 그 위는 또 흙으로 덮고 나서 감나무를 세워 보았습니다. 적당하군요. 묘목 뿌리에 흙을 얹어 무덤을 지으려면 아내가 잡아주어야 하는데 선뜻 부를 수 없네요. 아마도 이름이 역할에 붙은 꼬리표여서 아내가 서러운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설거지를 도맡고, 추운 겨울 개울가에서 손 얼어가며 빨래를 했다는 아내입니다. 어린 동생을 업어 재우는 것도 독차지였다고 합니다.

“안 심고 뭐 해?” 쪼그려 앉아 이런 생각을 하는데 곁에 온 아내가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잡아주어야 심지.” 저도 같은 투로 대꾸합니다. “나무 하나도 혼자 못 심어?” 심고 나서 아내와 저는 회초리 같은 감나무를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저 나무가 언제 자라서 주먹만 한 감을 달아줄까 싶습니다.

갑자기 나무 심은 게 후회가 됩니다. 가만두어도 갈 세월이지만, 감나무 두 그루에 몇 년을 미리 허비해버린 느낌입니다. “왜? 댁도 서러운가, 고작 나이 드는 게?”아내가 비웃는군요. “고작?!” 이러며 대들려다가 요즘 터득한 우회 전략을 써먹기로 합니다.“그런가? 토마토나 심으러 가자, 고작.”


 토마토 모종이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여느 해와 달리 일찌감치 마련된 터전에 토마토를 꾹꾹 눌러 심는 아내의 모습이 경쾌합니다. 은근히 곁으로 가“예쁜아” 하고 아내를 불러보았습니다. 반사적으로 제 옆구리를 팔꿈치로 강타하며 아내가 외칩니다.“내가 개야, 고양이야!”동물들 어를 때 제가 늘 하는 말이 예쁜이거든요. 추가 타를 피해 달아나며 저도 외칩니다.“사람이든 동물이든 예쁜 건 예쁜 거지. 안 그래? 예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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