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용 섭

충청북도농업기술원장 교육학박사

 

 

 

신축년(辛丑年) 새해 벽두,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리는 청주의 우암산(牛巖山)을 오르며 그 어느 해 보다 벅찬 가슴으로 떠오르는 해를 마주했다. 코로나19로 유난히도 힘겨웠던 지난 한 해를 떨쳐 버리고 맞이하는 새 아침이기에 설렘과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십이간지 동물 중에서 소는 제일 뚝심 있고 순박하며 충직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소같이 벌어서',‘소같이 일한다.’‘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 이란 속담들이 인간에게 소의 근면과 성실함을 일깨워 준다. ‘소더러 한 말은 안 나도 처(妻)더러 한 말은 난다’라는 격언 또한 신중해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로부터 소는 우리의 농업, 농촌과 가장 가까이에서 농업인들과 삶을 함께해 온 가축(家畜)이다. 농경사회에서 부와 재산을 상징했던 소는 농사의 신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고대 중국 전설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도 머리는 소에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였다.

인도를 비롯한 힌두 문화권에서 쇠고기를 금기시하는 것도 신성한 동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묵묵히 논과 밭을 갈고 달구지로 짐을 날랐던 소는 든든한 일꾼이었으며 집안에서 버금가는 재산목록 1호였다. 불과 사오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가가호호 소 한두 마리는 길러서 외양간이 있었고 지방마다 소를 거래하는 우시장이 서는 날이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는데, 우리말에서 식구(食口)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이르는 것으로,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만큼이나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는 힘든 일들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는 예나 지금이나 값이 비싸 목돈으로서 생계는 물론 그 어느 나라보다 교육열이 높았던 시기에 자녀들 학자금의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 정월 들어 첫 번째 맞는 축일(丑日)을 소의 날이라 하여, 이 날 만큼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고 쇠죽에 콩을 넣어 소를 잘 먹였다.


  소는 1천8백 년∼2천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22년(438년) 백성에게 소로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차법(牛車法)이 이때부터 활용됨으로써 교통과 운반의 수단으로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지증왕 때(502년) 농사짓는 데 소를 이용한 우경법(牛耕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삽과 괭이, 가래와 같이 인력에 의한 경작 농구에 의존해 오던 농법에서 축력을 이용하여 쟁기와 보습으로 논밭을 가는 생산기술로의 전환은 역사적으로 농업기술의 혁신이었다.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훨씬 능률적이고 더 넓은 면적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심경이 가능해짐으로써 토양을 부드럽게 하고 통기를 좋게 하여 토질 개선을 가져와 생산성 향상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소가 맹수로부터 아이를 구해 헌신을 기리는 우혜(牛惠)마을, 아홉 마리의 소를 키워 번성한 구축(九丑)마을과 같이 전국에 소와 관련된 마을과 섬, 산 등의 지명(地名)이 731곳에 이른다고 한다. 농촌 들녘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워낭소리를 더 이상 듣기 어려워 아쉽기만 하다.


삶을 뜻하는 한자인 생(生)은 소 우(牛)자 밑에 하나 일(一)이 조합되어 있다. 의미를 부여한다면 삶이란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생을 산다는 것은 우여곡절 속에 고통과 기쁨이 동전의 양면처럼 동반된 일생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이다. 부디 새해는 어질게 큰 눈망울과 근엄한 뿔, 굳센 힘을 지닌 소의 품성을 닮아 평화와 건강, 의지가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 농업인 모두‘우보천리(牛步千里)’의 마음으로 내일을 향해 다시 힘차게 내딛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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