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감자를 심었습니다. 좀 이른 편입니다. 이틀에 걸쳐 비가 온다는 예보여서 서둘렀습니다.
겨우내 묵혔던 밭을 가다듬느라 재게 움직이다 보니 굳었던 몸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해거름에 날이 흐려지면서 부슬비가 내릴 즈음에는 입에서 단내가 납니다.
풀렸던 몸 이곳저곳이 쑤십니다. 너무 서둘렀나 봅니다. 어둑해지는데도 아내는 쪽 나눈 감자는 다 심겠다고 악착같이 호미질을 합니다.


“올해는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심는구나.”
“고작 한 자루인데?”
평수로 따져도 100여 평 남짓이니 마을 농민들 재배 규모에 비추어보면 텃밭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매년 다른 일로 바쁜 탓에 감자는 늘 지각하기 일쑤여서 “차라리 가을 감자 심으시지?”라는 말을 듣던 터라 속이 시원합니다. 다 심고 나서 아내와 저는 밭고랑에 퍼질러 앉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하루의 끝은 늘 만족과 아쉬움이 교차합니다. 일의 순서를 잘못 잡아 수월하게 넘어갈 일이 꼬이는가 하면, 반대로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뜻밖에 운수가 트이는 날도 있습니다. 감자를 심은 오늘은 어떤 날일지 되짚어보는데, “생강나무꽃 곧 피겠네.”라고 아내가 중얼거립니다. 문득 알싸하다가 향긋해지는 꽃내음이 코를 스치는 것 같습니다. 샛노란 경단이 여럿 모여 이룬 작은 꽃송이가 무리로 일제히 피어나는데요.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히며 갈색이 여전한 숲을 화들짝 깨우는 모습은 가히 장관입니다.


예전, 우리나라 중북부 지방에서는 기름을 짜 여인들의 머릿기름으로 썼다는군요. 남도의 실용적인 동백기름에 비해 훨씬 더 매혹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해마다 아내와 저는 뒷산을 기웃거리며 생강나무꽃을 따서 잘 말린 다음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우려내어 차로 마십니다. 나뭇가지 역시 말려두었다가 닭백숙에 넣어 각별한 맛을 즐기기도 합니다. 참으로 귀한 자연의 선물입니다.


빗발이 조금씩 굵어지자 아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어떤 귀농인 부부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귀농 3년도 지난 어느 날, 불현듯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는 겁니다. 지난 삼 년을 농사짓느라 하늘 한 번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제야 들도 보이고 산도 보였다네요.


과속 운전자의 시야가 좁아져 폭넓게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아쉽고 아까워서 억울했다는 그 부부는, 한숨을 섞어가며 그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아쉬움과 아까움에 우리 부부는 공감했습니다.'


산적한 일과 부지불식간에 덮쳐오는 여러 어려움에 맞섰던 용기와 의지가 나중에 돈키호테식 만용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손해와 피해를 감수할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해 송곳처럼 날카로운 심정으로 성공을 향해 마구 달리기만 했던 어리석음 말입니다. 목적을 목표로 착각하고 살았던 세월의 대가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하늘 많이 봤잖아.”
그랬습니다. 자의식이 강해서인지 뜻대로 안 되면 저는 쉽게 어이없는 심정이 되고 맙니다. 자만과 독선이 특별한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가 아니었습니다. 말도 뜻도 통하지 않는 식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강했으니 사소한 실망은 물론 심각한 좌절 또한 자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댁은 몸으로 때우느라 몸만 축났잖아.” 사실, 아내는 노동 자체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눈팔고 딴생각만 머리에 꽉 찬 남편 덕이지, 안 그래?” “바쁠수록 돌아가라잖아.” “아예 딴 길로 가니까 문제지.” “멀리 봐야 지름길도 보이는 거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마시지?” 이렇게 아내와 단문으로 말싸움을 하다 보면 괜한 흥이 납니다. 옛날 선비들이 한시를 돌아가며 한 구씩 짓는 느낌도 듭니다. “아, 생각났다. 링반데룽!” 등산하다가 폭풍우 등으로 인해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곳을 맴도는 현상, 링반데룽. 올해도 농사에서 어려움이 많겠으나 그것에 사로잡혀 헛되이 방황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그러자면 완연한 봄, 자꾸 급해지는 마음을 우선 생강나무 꽃차로 다스려야겠습니다. 아내도 동의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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