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쌀가공식품협회 이성주 전무이사


현대는 글로벌 밸류체인 시대로 자유무역주의라는 기초 위에서 각 국의 긴밀한 협조하에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반도체산업에 있어서도 일본의 고품질 반도체 부품소재를 조달하여 한국이 첨단제조기술로 반도체를 만들고 미국, 중국 등 전 세계가 경쟁력 있는 완제품을 만드는데 공급해 왔다.

자유무역주의가 추구하는 대표적인 가치사슬의 한 예이다. 수출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한국은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한 글로벌 교역적 가치를 중시하여 왔다. 2015년 OECD 한국보고서에 의하면 G20 국가 중 한국이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할 정도다.


그러나, 최근 자유무역주의가 강대국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전세계 G2인 미국·중국 간의 무역분쟁이 출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고, 미국처럼 우방이라 믿었던 일본이 우리에게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소재 등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함으로써 경제전쟁을 도발해 온 것이다. 강대국은 언제든지 국제간 무역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은 우리경제의 심장부를 찾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 부르는데 가전제품, 인공지능, 로봇, 슈퍼컴퓨터는 물론이고 에너지 생산 등 반도체 없이 산업은 작동할 수 없는 세상이다. 반도체산업은 한국의 성장동력이며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는 한국의 자랑이자 미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D램 72.4%, 낸드플래시 49.5% 정도라 한다. 미국, 중국과의 극심한 경쟁 속에서 반도체 분야의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결과다.


하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반도체의 소재 국산화율이 50.3% 수준이라는데 국민들은 실망하였고, 고품질 핵심부품은 일본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나아가 반도체산업의 안정성장을 위해서는 부품 조달을 다변화하고 이것이 어려운 핵심부품에 대해서는 국산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의 경제도발은 상호간 이익이 되는 글로벌 자유무역체제하에서도 정치·경제적인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고 한국산업의 취약점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경제개발 초기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농업의 경쟁력 저하를 이유로 농업과 농촌을 희생한 측면이 있고, 그 기저에는 수출로 벌어온 돈으로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서 해결하면 된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강대국이 농업선진국이란 사실은 그만 두고라도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을 무시한 채 식량자립을 가볍게 여긴 결과 어려움에 처한 국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원래 농산물수출국이었지만 세계제일의 석유매장량을 믿고 농산물수입국이 되더니 국가부도사태가 나서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나일강 주변의 광활한 옥토를 가진 이집트도 세계제일의 밀수입국으로 전락하여 밀 가격 상승 때마다 식량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필리핀 또한 과거 쌀을 자급하는 나라였지만 값싼 쌀을 수입해 먹다 보니 자국의 쌀농업이 쇠퇴하여 쌀 가격 상승에 따른 식량조달의 위기를 맞곤 한다. 이 모두 식량안보에 둔감하고 농업을 가볍게 생각한 결과다.


한국도 쌀이 초과 생산되는 요즈음 쌀 생산 감축에 애를 쓰고 농정의 주요정책과제였던 농지보전에 대한 필요성이 한층 둔감해진 것 같다. 1990년에 1,345천ha이던 논면적이 2017년에 865천ha로 36.7%나 감소했다. 개발이익이 중시되어 쌀의 가치가 훼손되고 우량농지가 감소함으로써 농업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쌀이 조금 과잉생산된다고 걱정하기 보다는 생산한 쌀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지를 연구하는 것이 백번 낫다. 쌀은 우리의 주곡으로서 다양한 쌀가공식품의 원료이며, 화장품 등 비식용 재료로도 활용할 수 있고 그릇, 빨대 등 일회용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남는 쌀이 있다면 애완용 고급사료나 주정용으로 수입해 쓰는 옥수수, 타피오카를 대신할 수도 있다. 쌀의 가공적성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연구성과에 따라서는 쌀의 용처와 경제성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 하는 것도 국민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자립기반이 필요한 품목이 쌀이란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의사와 반하여 촉발된 반도체산업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사례를 통해 농업분야에서도 식량안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반도체산업의 독립과 함께 쌀의 가치와 농산물 자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농업기반을 보다 튼튼히 다지는 기회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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