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걷이라고 털어낸 게 들깨지만 제대로 심질 못했으니 얼마나 수확할 것인가는 애당초 기대 밖 일이었습니다. 가뭄 속에 억지로 정식한 거 조금에다 여기저기 씨앗이 떨어져 저절로 자란 돌 들깨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걷어 들인 게 겨우 한말이 될까 말까할 양이었으니 어디 가서 차마 농사짓고 있노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성적푭니다.

철부지처럼 또 김장배추를 늦게 심은 탓에 올해도 어김없이 배추는 짧아지는 햇살처럼 자라다 말았습니다. 그나마 쪽파가 잘 자라줘 올 김장때 쪽파 값은 들지 않아 겨우 체면치레는 한 셈이지만 어째 해가 갈수록 농사짓는 솜씨가 늘기는커녕 점점 힘만 드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잡초들도 어김없이 차가워지는 바람에 제 몸 색깔을 빼앗기며 바닥에 누워버려 베어낼 시기는 놓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덕에 예상치도 못했던 늙은 호박 몇 개 건졌으니 이것도 복이라면 복입니다.

된서리가 지나간 자리엔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잘 버티던 방울토마토도 결국 삶아 놓은 잎처럼 맥없이 늘어지고 겨울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살얼음이 얼면 고추지지대를 뽑아내고 비닐을 걷어내는 일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동쪽 높은 산마루를 넘은 해가 서쪽 산마루로 달려가기 전 장갑을 챙겨 밭으로 나갑니다. 30여 포기 심었던 배추는 그래도 배추랍시고 집사람 손에 의해 대부분 양념을 짊어지고 김치냉장고로 들어갔고, 몇 포기는 국거리용이 돼 신문지에 쌓여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점점 더 게을러지는 몸을 추슬러 고추줄을 풀고 지지대를 뽑아 정리하다가 그만 차가운 바람에 지레 놀라 집으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농한기입니다. 사실 농사철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제대로 한 일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정한 농한기라고 빈둥거리는 게 남세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다 나이 들어가는 탓이려니 할 수밖에요.

치열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 노인은 거추장스런 존재로 추락되기 십상입니다. 뉴스는 한평생 노인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는 이들이 생산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뭐 시골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대부분 주민들이 노인들이니 그저 못들은 척 하면서 지낼 뿐이지요. 어쨌든 농한기가 되면 시골노인회는 평소보다 더 바빠집니다.

인구가 줄어드니 나이만 차면 저절로 노인회에 자동으로 가입되고 저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노인회장이라는 분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사실 물리적 나이는 충분히 노인대열에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마음 속 저는 아직 청춘이라고 우기는 판에 노인회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전화용건인즉슨 동네 노인회에서 당일치기로 온천여행을 가니 참석여부를 알려달라는 거였습니다.

사실 노인회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적도 없으니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 도리가 없고, 또 회원 면면도 모르는 판에 온천여행이라니 참 가당치도 않은 제안이지요. 알몸으로 목욕할 정도는 웬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니까 말입니다.

서울 갈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일단 거절은 했습니다만 집에서 마을회관 마당까지는 코앞이라 집에 있기도 뭐해 새벽부터 집을 나서게 됐습니다. 마침 집사람도 서울 딸네가 있어 혼자 돌아다니기는 그만인 찬스였긴 했지만,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무작정 차를 몰고 나와 가까운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바다는 낭만적 관점에서는 멋진 풍경이지만 현실은 추위에 패딩점퍼를 입고나올 걸 잘못했다는 후회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차에 올라 바닷가를 끼고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를 즐깁니다.
앞마당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옵니다. 잎이 전부 떨어지고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난  명자나무 줄기에 참새들이 가득 들어앉아 재잘거립니다. 뭐가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어떤 때는 정말 시끄러울 정도로 재잘거려 문을 열고 ㅤ쫓아보지만 소용없는 짓입니다. 겨울 칼바람도 참새들의 재잘거림을 막을 수 없는데 그저 그러려니 바라보다보면 곧 봄이 찾아 올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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