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힘든 여정입니다. 초봄에 이사를 하고 새 농지를 임차해 틈틈이 감자까지 심을 때만해도 올 농사를 망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봄 가뭄이 심했지만 그래도 여러 차례에 걸쳐 포트에서 키운 옥수수 모종이나 토종오이는 물론, 시장에서 구입한 땅콩 모종, 먼저 집에서 파서 옮겨 심은 삼채도 마을사람 눈치 보면서 물을 길어 겨우 키워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겨우겨우 옥수수 좀 수확하고 나서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걸 망쳐놓았다는 거지요.

이미 이것저것 심어놓은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밭에 들깨나 심으리라고 모종을 냈습니다만 워낙 날이 가물어 싹 틔우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옮겨 심을 만큼은 자라야 할 모종이 겨우 싹을 틔울 무렵 계속되는 빗줄기에 제대로 풀을 매주지 못했더니 그만 풀숲에 묻혀 숨도 쉬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겁니다.

그래도 모종밭 가장자리에서 잡초들 등쌀을 이겨내고 제법 자란 모종이 있어 잡초가 덜 무성한 땅을 골라 심기는 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쳤으니 흥이 날 리가 있겠습니까. 건성으로 심어놓은 들깨가 제대로 자라 결실을 맺을 거라는 기대는 버렸으나 농부가 돼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후회가 막심합니다.

인근 밭들을 보면 빗줄기가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자라고 있는 작물들을 보면 비 탓으로 돌리기에는 제 게으름이 이 지경을 만든 셈입니다.

이럴 때 가슴이 답답하면 한 대 피워 물던 담배 생각이 절로 나는 걸 보면 아직도 완전히 금연했다고 장담하긴 이른 모양입니다. 언제라도 유혹을 받으면 다시 물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지만 어쨌든 잘 참아나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비가 계속해서 퍼붓지는 않았으니 짬짬이 빗줄기가 뜸해질 때 풀을 매줬더라면 밭 전체가 풀밭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참 들여다보면 한심할 따름입니다. 풀밭 사이로 여기저기 오크라 몇 포기와 고추 20여 주, 그나마 2포기 심어놓았던 참외가 꾸준히 열매를 맺어준 덕에 그곳만은 열심히 뽑고 베어낸 티가 날 뿐입니다.

옆 밭주인이 대놓고 얘기는 못하고 집사람에게 에둘러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이대로 놔뒀다간 내년에 모조리 풀밭이 될 거라며 걱정이 가득하니 베어내긴 해야겠는데 생각은 당장이라도 밭으로 달려 나가지만 몸은 영 말을 듣지 않으니 문제는 문제지요.

울울창창한 풀밭을 거의 개간하듯 배추 몇 포기와 무심을 자리를 만드느라 한나절을 소비했습니다. 풀을 베어내고 다시 괭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작업은 게으름 피운 벌칙인양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힘든 과정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3년 묵은 무씨와 총각무씨, 그리고 적갓과 청갓을 파종하고 종묘상에서 구입한 배추 30포기 심고 나니 그나마 최소한 농부의 도리는 한 셈이라고 스스로 자위하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어쨌거나 옆 밭과 접한 밭 잡초들은 이제 키가 거의 제키에 근접할 정도니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을 믿고 과감히 낫을 들긴 했지만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베어도 티도 나질 않습니다.

몇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베어내질 않으면 앞으로 대책이 없으니 새벽마다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풀과 씨름합니다.

해가 뜨면 어디서 숨어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모기들이 떼거지로 덤벼드니 모기약통 들고 대적해보기도 하지만 견딜 재주가 없으니 그저 퇴각하는 게 상책입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뒤돌아보니 베어놓은 풀 더미가 노적가리 수준입니다.
아마도 바로 옆으로 지나는 기차손님들이 보면 뭔가 수확해서 베어놓은 걸로 착각하길 바라지만 어림도 없는 바람입니다.

그래도 이런 고생을 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수확을 얻었으니 풀숲에 방치했던 도라지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니 아무렇게나 벨 수도 없어 시간은 더 걸립니다. 봄에 심었던 단호박도 줄기가 말라죽었지만 그 와중에서 결실을 맺어 늙은 호박 몇 개를 선물합니다. 농부는 게을러도 작물들은 제 할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풀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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