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품질관리원이 주관하는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기 위해 밭 임대차계약서를 들고 강릉사무소를 찾아 갔었습니다. 지자체별로 차이가 있음은 알았지만 먼저 살던 동해시에서는 요구하지 않던 농자재구입영수증이라든가 이웃들로부터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다는 확인서가 필요하다는 말에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아 알았다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사실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봄철 배당되는 가축분 퇴비를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가 농지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야 당연히 여러 가지 농업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저처럼 농지를 임차해서 경작하는 입장에서는 별다른 혜택을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제출해야 할 서류가 생각지도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밭주인이 농관원 콜센터에 전화해 땅을 임대해 줬음을 알려야 한다는 조건도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밭주인의 입장에서는 직불금 수령도 포기해야 하고, 농협조합원으로서의 혜택도 포기해야 하는 문제니 차라리 땅을 놀리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 된 겁니다.

허리가 아파 보행기에 의지해야 겨우 걸음을 뗄 수 있는 입장인 밭주인이지만 제게 임대해서 받는 임대료 수입보다 그동안 농업경영체로서 받았던 혜택이 더 크거나 같다면 당연히 임차인을 위해 전화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자리에서 농업경영체 등록에 대해 양해를 구했을 때만 해도 직불금 수령이나 농협조합원으로서의 불이익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보행기에 의지해 운동 나온 밭주인에게 콜센터로 전화해야 제가 등록이 가능하다는 말에 일단 통화는 했습니다만 상당히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는 못하더군요.

저 좋다고 밭주인이 불편해하는 일을 강행해봐야 제대로 일이 진행될 턱이 없습니다. 결국 결정권을 쥔 사람은 땅주인인 남자보다 여자이기 마련입니다. 70대 후반인 할머니는 주로 시내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 딸네서 손주들을 돌보느라 주말에야 이곳에 왔다 일요일 오후에 다시 시내로 나간다고 합니다.

괜히 전화하게 했나하는 마음에 불편해 하고 있을 때 땅주인 할머니가 이사 온 집 선물이라고 두루마기 휴지 한 통을 들고 찾아 왔습니다. 동네에서 만만치 않은 할머니라고 소문이 났다는 얘기는 전 집주인으로부터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앞뒷집에 담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서 서로 불편함이 없도록 하자면서 제게 등록을 포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니 어쩌겠습니까.

밭 임대차계약은 개인 간의 거래로 하고 공식적으로는 밭을 빌려주지도 빌리지도 않은 거로 한 거지요. 집사람은 그래도 아쉬워했지만 좋은 게 좋다는 건 인생살이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서류를 접수했던 농관원강릉사무소에 전화해 농업경영체등록을 취소한다고 통보하고 땅주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결국 귀촌해서 5년만에 농업인에서 무직자로 전락하게 됐지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어차피 등록이 됐던 아니든 밭에서 힘들게 일하는 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필요로 했던 가축분퇴비 구입은 밭주인이 예년대로 신청하고 그 대금은 제가 지불하는 것으로 했으니 저는 저대로 만족할만한 거래가 됐고 밭주인도 만족하게 됐으니 모든 게 잘 풀렸습니다.

날이 워낙 가물어 잡초조차도 맥을 추지 못합니다. 잡초의 제왕이라는 바랭이도 겨우 싹을 내민 채 숨죽이고 있습니다. 이제 한 두 차례 단비라도 내린다면 온 밭을 점령하겠지만 아직은 내버려두고 볼만 합니다. 4월에 뿌려놓은 도라지 씨앗은 잡초와 가뭄 탓인지 여기저기에서 드물게 새순을 올리고 있지만, 그나마도 김매기를 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자랄 것 같지 않아 걱정이긴 합니다.

더 잡초들이 무성해지면 손쓰기도 어려울 텐데 호미 들고 고랑에서 풀맬 일이 끔찍해서 오늘도 못 본 척 지나치고 맙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비는 올 생각조차 없으니 농사짓는 일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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