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평 새로 빌린 밭은 네모반듯한 경사가 없는 땅입니다. 전에 살던 곳 밭은 워낙 경사가 있었던 터라 일하는 자세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허리에 무리가 갈 정도였는데 지금 밭은 경사가 없다보니 횅하니 더 넓어 보입니다.

밭주인이 나이도 들고 허리가 아파 더 이상 농사짓기가 힘들다며 임대로 내놓은 밭 가운데로 이미 이웃사람이 마늘밭을 만들어 놓아 자연스레 구획은 됐지만 어디에 무얼 심을 까는 고민거리가 됐습니다. 이삿짐을 옮기기 전 옆집 밭과 경계지점에 감자밭을 일부 만들고 대략 100여 평 정도에 전에 살던 곳 이웃으로부터 얻은 도라지 씨를 뿌려 놓았지만 여전히 밭은 횅하니 넓기만 합니다.

농사는 시기가 중요한데 이사와 겹치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리는 일이 계속 늦어지니 괜히 마음만 급해 집사람과 다툼만 늘어납니다. 그래도 5년이나 농사를 지어봤건만 해야 할 일의 시기와 뭘 해야 할지가 늘 새롭고 헷갈리니 평생 농사를 지은 이들이 대단하다고 새삼 느끼게 됩니다.

뭐든지 포트에다 씨앗을 발아시키는 게 제일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집사람은 토종 고추는 물론, 오크라나 단호박, 심지어는 토마토까지 모종으로 길러내니 이걸 다 처리하는 일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삿짐을 싸서 옮기기 전부터 집사람이 길러낸 모종들은 몇 차례에 걸쳐 승용차로 따로 모셔야만 할 정도로 특별대우를 받았지만 문제는 밭에 정식해야하는 일입니다.

4월에는 수시로 비가 내리더니 5월 들어서는 영 빗방울 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밭주인이 기존에 만들어놓은 덩굴작물용 지주대를 이용해 작두콩이나 울타리 콩 몇 포기는 심어놓았지만 밭에서는 뜨거운 햇살아래 흙먼지만 날립니다.

장터에서 구입한 고추모종과 가지, 수박, 참외 모종들도 억지로 정식하긴 했지만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들시들해지니 밭으로 물을 나르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 돼버렸습니다.

물통을 실어 나를 수레부터 장만하기 위해 가까운 옥계장터로 나갔다 장날에나 문을 연다는 말에 결국 동해에서 늘 다녔던 단골철물점까지 가서야 수레를 구해 올 수 있었습니다. 집안을 뒤져 찾아낸 몇 개의 물통을 수레에 싣고 밭을 오가는데 이웃한 밭주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로 물통에 물을 받는 일도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마을에서 사용하는 상수도가 시에서 제공하는 광역상수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뭄이 심하면 관정도 말라 수돗물이 끊기는 일이 있어 밭에 물을 대는 일이 마을의 큰 문제로 비화된다는 겁니다. 전 거주지에서도 마을관정으로 물을 공급받았지만 가구별 계량기가 있어 사용량대로 물세를 내서 문제가 없었는데 이곳 관정은 가구별 계량기가 없어 무조건 가구별로 매월 5천원을 내는 불합리도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라는 거지요.

물이 부족해 수도공급이 끊기는 일이 가장 큰 문제지만, 많이 쓰는 가구나 할머니 혼자 소량 사용하는 가구나 동일하게 물세를 내야하니 공평성에 대한 문제도 만만치 않은 겁니다.

이러니 사람도 없어 못 쓰는 물을 밭으로 나르는 사람이 곱게 보일 리가 만무할거고 그로 인한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삿짐 내린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집에 뭐라 하기가 그래서 그렇지 마을 할머니들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느낀 게 지레 짐작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밭에서 모종들은 뜨거운 햇살아래 죽어가고 있고, 그나마 물을 길어다 겨우 연명이라도 시키려면 할머니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밭을 오가야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볼 뿐입니다.

다행히도 비소식이 들립니다. 전국이 다 가뭄으로 목이 타들어 가는 일이 매년 반복되는 걸 보면 기후변화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아마도 대대로 이어 내려온 농작물도 이제는 봄 가뭄을 이겨낼 작물로 교체해야만 생존이 가능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는 광역상수도가 빨리 연결돼 눈치보지 않고 물통을 나를 수 있길 바라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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