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전국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라고 한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고 풀이되는 원문은 《순자》 <왕제> 편에 나온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군주민수는 육영수 중앙대 교수가 추천했으며 응답한 교수 611명 가운데 198명, 32.4퍼센트가 이 성어를 꼽았다. 대략 셋 중 하나 꼴로 군주민수를 뽑은 셈이다. 일부 교수는 주권재민의 원리를 이야기한 2천5백 년 전 순자에게 경외감을 느낀다며 군주민수는 민주주의 본령에 합치한다고도 했다.

군주민수와 경합을 벌인 사자성어는 역천자망(逆天者亡)이다. 약 29퍼센트, 176명이 뽑았다. 그 다음이 18.5퍼센트의 지지를 받은 노적성해(露積成海)이다. 역천자망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망하기 마련’이라는 뜻이고, 노적성해는 ‘이슬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말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는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농단은 입헌민주주의의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원리를 거스른 일”이라고 역천자망 추천이유를 댔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촛불 바다’에 견줬다.

군주민수, 역천자망, 노적성해를 뽑은 교수는 거의 80퍼센트에 이른다. 교수 대부분이 국정농단 사태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 그리고 이를 이끌어낸 촛불 시위가 올해를 특징짓는다고 밝힌 것이다. 최종후보에 오른 다른 사자성어들도 현 시국을 투영하고 있다. 예컨대 공적인 일을 핑계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다는 빙공영사(憑公營私), 사람이 하늘을 이긴다며 민심이 천심임을 밝히는 인중승천(人衆勝天)도 많은 이의 선택을 받았다.

오호 장난 아닌데, 그럴싸하다고 해야 하나?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사회현실과 세태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공감하니 금세 흥미가 생겼다. 지난해에는 뭐였지, 박근혜 정부 집권기에는 어떤 사자성어가 입길에 올랐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대통령이 취임하고 두 달 후에야 내각 구성이 완료된 2013년, 가슴 아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메르스라는 난데없는 전염병으로 민심이 흉흉했던 2015년을 교수들은 네 글자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찾아보게 됐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뉴 밀레니엄의 꼭두머리랄 수 있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 새 천년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는 듯 첫해에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뽑았다.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른 2002년은 이합집산(離合集散), 참여정부 일차년도인 2003년은 우왕좌왕(右往左往), 노무현 대통령 국회 탄핵과 헌재 기각에 이은 총선 등으로 당파 싸움을 벌였던 2004년은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뽑혔다. 위에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라는 상화하택(上火下澤)의 2005년은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을 꼬집었고, 될 듯 말 듯 구름만 잔뜩 끼고 비가 내리지 않는 밀운불우(密雲不雨)가 2006년을 가늠케 한다.

대선이 있던 2007년부터 올해의 사자성어는 약간 다른 양상을 띤다. 체제나 계층, 집단 간 갈등에 주목하고 사회세태나 대표적인 문화현상을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으나 이때부터 좀 더 신랄한 성어가 출현하고, 화살이 대통령 등 특정세력 또는 사람을 향하게 된다. 그만큼 동원된 한자도, 한문도 난이도가 높아졌다. 한꺼번에 두 고사성어가 결합한다든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송이 등장하기도 한다. 남은 물론 자신조차 기만하는 사람을 풍자한 자기기인(自欺欺人)의 해가 2007년이다.

이명박 정부 5년간의 사자성어는 불통과 아집, 기만에 대한 반감을 여실이 드러낸다. 호질기의(護疾忌醫)는 병을 숨겨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문제가 있는데도 충고를 듣지 않음을 탓한다. 샛길과 굽은 길이라는 방기곡경(旁岐曲逕)은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밀어붙임을 비유한다. 머리는 겨우 숨겼으나 꼬리는 드러났다는 장두노미(藏頭露尾)나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은 모두 4대강 사업이나 해외자원외교 등 집권세력의 기망을 고발하고 있다. 제18대 대선이 있던 2012년은 거세개탁(擧世皆濁), 세상이 혼탁해 홀로 깨어있기 힘든 해였다.

박근혜 정부 출범원년부터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는 ‘퇴행’을 담아내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넘어 그 근본까지 흔들고 헌법마저 유린하는 정권에 망연자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도행역시(倒行逆施)는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하는 것을 염려하고 경계한다. 이듬해 지록위마(指鹿爲馬), 2015년 혼용무도(昏庸無道)도 허위와 혼돈이 판치는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 말이다. 세월호 참사, 정윤회 국정개입 사건 등에 대해 정부가 본질을 왜곡하고 사슴을 말이라며 거짓을 진실인 양 호도하는 행태를 꼬집었다.

지난해에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민심이 흉흉한데도 정부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고,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 논란과 종군위안부 밀실합의 등 역사와 민심을 깔아뭉갰으며, 청와대가 국회의 존재가치를 무시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등 ‘독재’로 회귀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렇듯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탓에 세상이 어지럽고 암흑에 휩싸였다는 혼용무도는 군주민수, 역천자망, 노적성해, 빙공영사, 인중승천의 전치사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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