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시골마을에 들어서 있는 마을회관은 마을주민들의 사랑방으로서 사랑을 받는 공간입니다. 사랑방은 소통과 화합을 위한 대화의 장소이고, 또한 쉼터이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골짜기에는 12가구 남짓 살고 있습니다만 주민들 대다수는 80이 넘은 고령자들이고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건너편 집 부부는 늘 외지로 나가 일을 하는 통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행정동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이웃하는 더 큰 동에 흡수되어 동사무소조차 없는 마을이 되고 말았겠습니까. 이러다보니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뭔가를 할 수 있는 마을회관조차 없는 그야말로 잊힌 마을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어린이들이 사라진지 오래된 마을에서 학교가 아직 남아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나마 마을의 구심점이고 소통의 광장이었던 학교도 문을 닫은 마을에는 운동장에 무성한 잡초마냥 적막함만이 가득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자물쇠로 굳게 잠겼던 학교운동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폐교에 들어선 커피숍 때문입니다. 사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커피숍이란 게 그리 탐탁하게 보일 리는 없었겠지만 가끔 커다란 종이컵에 가득 커피를 담아 일부러 집집마다 다니면서 공짜 커피 제공도 마다하지 않으니 점차 커피 맛에 길들여지게 되는 거고 커피숍도 예뻐 보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웃한 특이한 이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심성이 고운 커피숍 젊은 아가씨 사장의 골짜기 사랑이 깊은 지라 각종 민원사항들도 잘 처리하면서 고비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있습니다.

커피숍에서 커피 체험장으로, 또 다시 게스트하우스로의 변신이 힘들었을 텐데 꿋꿋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민들이 주 고객이 아니니 결국 외지인들이 많이 찾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어서 인터넷 블로그나 SNS 등을 잘 활용해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하니 곧 문전성시를 이룰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산책길에 오다가다 커피숍에 들르면 냉수 한 잔 마시면서 마을 소식을 세세히 듣게 됩니다. 누구네 집 어르신이 아파서 입원했다든지 양어장을 만들겠다고 웅덩이를 팠는데 경험이 없어 입식한 미꾸라지들이 죄 폐사했다는 얘기까지 커피숍 탁자 위에는 이야기꺼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커피숍이 마을 사랑방에서 회관 역할을 하게 된 계기는 느닷없이 닥친 골짜기 석산개발 움직임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커피숍 주인장이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알리면서 자연스럽게 커피숍으로 주민들이 모이게 됐고, 저절로 대책회의를 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 것입니다.

손님을 받고 커피를 팔아야 될 장소가 마을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이 됐음에도 기꺼이 따뜻한 커피까지 내 오는 마음이 기특한 건 제 생각만은 아닐 겁니다. 석산개발을 무산시키기 위한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고 급하게 추진돼 만들어진 개발반대추진위원회 총무로 제법 경비가 들어가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마을로서는 커피숍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날조된 환경영향평가서에 반박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사업예정지 험준한 산골짜기까지 몇날 며칠 동안 오르락내리락도 불사하겠다니 젊음이 좋긴 좋습니다.

석산개발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치기 전엔 그저 하나의 영업장이었던 폐교 커피숍이 이렇게 마을주민들의 의견을 수합하고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된 게 잘 된 일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계기로 거의 교류가 없던 아랫마을 사람들까지도 힘을 합치게 만든 건 틀림없는 커피숍의 공로입니다. 그저 골짜기를 드나들 때 무심히 차를 타고 지나가던 길목에서 이제는 차창을 열고 반갑게 안부를 묻는 인사를 나눌 수 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울려 살아가는 계기가 된 석산개발이라는 악재를 딛고 마을 전체가 이 골짜기를 잘 지켜내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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