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저를 부르는 단어는 직업과 직급과 관련된 것들로 전부 사회통념상 일반적인 조직에서 통용되는 호칭뿐이었습니다. 무슨무슨 씨보다는 대리님이니, 과장님이니, 혹은 부장이나 이사님으로 불리고 자금난으로 접어야 했던 출판사 시절에는 사장님 소리까지 들었지만, 최종 직장에서 정년퇴직할 때는 국장님으로 불렸으니 되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계급을 거쳤구나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사시절에 만났던 이들은 아직도 이사님이라고 부르고, 국장으로 만났던 이들은 여전히 국장님으로 부르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 현업을 떠났다 하더라도 으레 그렇게 호칭하는 게 듣는 이도 부르는 이도 편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기야 뒤돌아보면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만난 입사동기생들은 출신학교도 지역도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어쩌다 연이 닿아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들과는 그저 이름만 부를 뿐입니다.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부나 지위 등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질 않는 것은 어린 시절 친구마냥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아도 과거를 같이 공유한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산골짜기에서 과거란 거 때로 거추장스런 마음의 짐입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그저 평범한 시골아저씨 얼굴임에도 그게 신경 쓰이는 것은 아직도 미처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건너편 할머니야 제 머리카락이 하얀 것만 보고 영동사투리로 ‘할방’이라고 부르고 폐교에서 커피 체험장을 하는 젊은 아가씨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사실 호칭이야 상대방이 느끼는 대로 부르면 그만이지 괜히 호칭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제 자신이 우습습니다. 근 90세가 다 된 건너 집 할머니야 저를 뭐라 부르든 만날 때마다 누구신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늘 새롭게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 골짜기에 상주하는 가구라야 12가구도 되지 않지만 아직도 마을 초입에서 꽤 규모가 큰 하우스와 농토를 갖고 있는 이와는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있으니 도리가 아닙니다. 그저 그이가 누구네 외삼촌이고 농사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는 것은 겸연쩍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처음 이곳으로 이주했을 때 인사를 나눠야 했었는데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가 버렸으니까요. 어찌어찌 기회가 되면 인사를 나눌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지나가는 낯선 이들이 ‘아저씨 말씀 좀 물읍시다.’에 화들짝 놀라며 ‘아저씨라니 이것들이 내가 누구였는데 감히 시골아저씨 취급을 해.’ 속으로 화를 내지만 그게 지극히 당연한 호칭임을 저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밭에 나가 일하기 편한 옷은 도시에서 넥타이를 졸라맸던 와이셔츠입니다. 몇 년 흐르다보니 와이셔츠들이 흙물이 들고 더럽혀져 눈부시게 빛나던 흰 와이셔츠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현실은 쭈글쭈글하고 낡아버렸으니 사람도 매 한가지로 변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아저씨면 어떻고 선생님이면 어떻습니까. 아이들 눈에는 할아버지로 보일 테고 동네 사람들 눈에는 그저 평범한 아저씨로 보일 테니 그저 천국과 지옥이 제 마음 속에 있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올해도 가뭄을 피하긴 어려울 모양입니다. 작년처럼 극심한 상태는 아니지만 벌써 비다운 비가 내린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워낙 재배기술도 부족한데다 물도 부족하니 심어놓은 작물들이 자라는 게 영 시원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올해만큼은 바랭이 같은 악질 잡초는 꼭 잡으리라는 결심으로 수시로 고랑을 긁어주고 이랑에 올라온 싹들을 뽑아줍니다. 뭐 그렇다고 하느님이 기르는 잡초를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최선을 다하다보면 뭔가 성과가 조금은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결국 연초에 집사람과 함께 올해는 자연농법으로 길러보자는 약속은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뭔가를 길러 그나마 수확이라도 하려면 그만한 노력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할 텐데 괜히 자연농법이라고 방치했다가는 농부아저씨라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엉터리 아저씨, 아줌마가 되긴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