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든 어촌이든 점점 고령화가 빨라지면서 휴경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전에야 가족단위로 농사짓더라도 대가족인 경우도 많고 식구가 많지 않은 집이라도 으레 동네별로 품앗이를 하면서 일손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동네품앗이를 기대할 수 없는 게 너도나도 다 늙어 꼬부라졌으니 서로 얼굴만 쳐다볼 밖에 다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규모가 있는 농사를 짓는 이들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소위 체험농장을 운영하면서 일손부족을 해결해 나가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체험농장이 전국 어디서나 다 비슷비슷하게 운영돼 도시민들의 전폭적 호응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공산품 시장에서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는 소비자가 ‘갑’이기도 하지만 또한 ‘을’이 되기도 쉽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이나 ‘갤럭시’시리즈의 신제품이 시장에 나올 때 밤샘도 불사하는 충성스런 고객은 이미 스스로 ‘갑’이기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렇지만 농산물은 이런 광적이고 충성스런 소비자를 창조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는 워낙 건강이나 먹을거리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서 실상 뭐가 제대로 된 먹을거린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공중파방송이든 종편이든 소위 잘 나간다는 이들을 초대해 듣도 보도 못하던 외국산 농산물에 대한 효능을 한참이나 주절거리고 나면 그 프로그램이 채 끝나기도 전에 TV홈쇼핑이 질세라 제품을 홍보하는 세상에서 믿을만한 게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봄이 오면 시작되는 농사일로 농촌에서는 그야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될 정도로 바쁩니다. 도시로 나가 사는 자식들까지 강제 소환해보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지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작은 도시인지라 도농복합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뭐 특별한 농산물이 나오는 것도 없어 일손을 구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러니 농사를 짓는 일이 뭐 신명나겠습니까.

집사람이 가입해서 활동하는 유기농협동조합은 로컬 푸드 개념을 적용해 매장 인근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가급적 많이 취급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언제라도 만나 이야기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생산지를 방문해 어떻게 생산되는지도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최대 장점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갑’과 ‘을’이라는 관계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을 겁니다. 소비자인 조합원이 생산자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때론 일손 돕기라는 특별 이벤트로 꾸며지기도 합니다.

수확하거나 김매기 같은 힘든 일로 소비자와 함께 하기란 쉽지 않긴 하지만 때론 힘든 노동일지라도 작은 정성으로 일을 거든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되면 그도 어렵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올봄 인근 과수원에서 일손 돕기 행사가 미리 예정된 터라 집사람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배나 복숭아는 오래전부터 납품되고 있어서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브랜드라 그런지 일손 돕기에 나선 소비자가 작은 미니버스를 가득 채울 정도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오전 일찍 과수원에 도착해서 시작한 일은 전정한 가지들을 한군데로 모아 치우는 거였습니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과실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가 언덕을 오르내리는 힘든 일조차 잊게 만들어 주는지 모두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더군요.

유일한 남자 참가자인 저는 대책 없이 남자로서의 의무인 힘쓰는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배운 게 많았던 하루였습니다. 과수원 주인장으로부터 가지치기에 대한 기본적 방법을 배웠으니 그만하면 내일을 제쳐둔 손해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이니까요.

일손을 거들었다고 맛있는 점심도 대접받고 작년에 수확해서 저온창고에 보관했다는 배에다 방금 방앗간에서 빼온 따끈한 인절미까지 한보따리 챙겨주는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을 뒤로 하고 돌아오니 온몸이 뻐근합니다. 마음과 달리 몸은 이렇게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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