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정신이 번쩍 날 정도의 맹추위가 전국을 덮쳤습니다. 이미 일기예보에서 반복적으로 알려는 주고 있었지만 뭐 진짜 그런 추위가 올까 반신반의하면서 집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습니다. 큰딸 내외가 집사람을 위해 부산구경을 하자며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우더니 그 실행일이 하필이면 몇 십 년 만에 찾아오는 강력한 한파가 몰려온다고 예보된 날이었습니다.

집사람이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로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더 많아져 수시로 한의원과 병원을 다녀야 합니다. 어차피 서울로 올라가 예약된 병원도 가야되고 여행도 갈 계획을 세웠으니 문단속과 함께 수도 동파를 예방하기 위해 부엌 수도를 물이 흐르게 약간 틀어놓고 출발했습니다. 이미 이곳에서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하는 지라 평상시 집을 비울 때 보다는 조금 더 많은 양의 물이 흐르도록 조치를 하고 나섰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뉴스는 연일 맹추위로 야기된 피해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어 여행길이 그리 편치는 않았습니다. 하기야 좁은 국토에서 동장군을 피해봤자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방도는 없습니다. 부산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얼마나 칼바람이 몰아치는지 얼굴이 꽁꽁 얼 정도가 되니 그만 여행이고 뭐고 빨리 돌아가는 게 상책이라고 하루 밤 만에 다시 차를 서울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은 당장 동해 집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며칠 더 서울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어서 그저 별일 없길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서울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라 집사람은 서울에 남기고 저 혼자 동해로 귀가하기로 했습니다. 오전에 출발했지만 동해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가 다 돼가고 있었습니다. 자물쇠를 열고 부엌에 들어서니 흘려놓고 간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질 않는 걸 보고는 자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는 복잡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 정리해야 될 일들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하여튼 일단 짐은 풀고 보일러 설정 온도를 올려 가동시키고 부탄가스 난로까지 켜고 방안에 온기가 찰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산에서 내려오는 샘물을 가둬 연결된 수도는 얼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쫄쫄 흐르는 물을 받아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먹고 사는데 물만큼 절실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당장 밥도 지어야 되고 화장실에서 볼 일도 봐야 될 판이니 물통이란 물통은 다 동원해야 돼 이게 보통 어설픈 게 아닙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당장 뭘 먹어야 밤을 지새울 터니 혹시나 해서 집에 들어오기 전 마트에 들려 사온 라면 봉지를 뜯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지낸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돼서야 뭔가 조치를 해보기로 하고 집안에서 가장 긴 연결전선을 꺼내 마당에 있는 계량기함을 열고 드라이어로 수도관을 녹여보기로 했습니다. 뭔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도 무산되고 뜨거운 물로 적신 수건마저 괜한 헛심을 쓴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계량기가 동파되지는 않았으니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관 중 개울을 건너는 다리 난간을 따라 연결된 노출부분이 얼어버린 게 틀림없어 시청 수도사업소에 민원전화를 넣었습니다. 마을단위 관정 간이상수도라 시청에서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고맙게도 다음날 담당자가 나와 상황을 살피고는 업자를 보내주겠노라 약속을 하니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습니다. 만약 시에서 처리해 주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많은 돈을 들여 해결하거나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될 처지였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습니까.

관로를 전부 해빙기로 녹여 개통시키기에는 적어도 이틀 이상 걸리는 작업이라며 임시로 도로부분 땅을 파 본선에서 따로 노출관을 연결시켜 집 수도까지 연결해 사용하고 봄에 원상 복구하는 방법으로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하늘이 흐리고 으스스한 날이었지만 그래도 제가 내온 뜨거운 봉지커피 덕분인지 공사는 잘 마쳤고 수도는 다시 물을 쏟아내게 되었습니다. 일이 잘 마무리 되니 그저 모든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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