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의 추위가 한창 일 때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의 아침온도가 영하7~8도일 때 시골도 꽤 추워서 몸을 움직여 어디를 가는 게 걱정스럽기조차 하더군요. 그래도 가야만 하는 일, 큰누님과 매형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인데 매형 돌아가셔서 초상 치르고 내려온 다음날, 그러니까 삼우제날 새벽에 누님마저 세상을 떠서 첫 번째 제사부터 두 분을 한날 모셨습니다. 그러니 더욱 가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볼일도 있어서 한 사나흘 집을 비워야 되겠기에 여러 번 집 안팎을 둘러보았습니다. 그게 결국 불 단속 물 단속이어서 아궁이에서 긁어낸 재에 불씨는 남아 있지 않은지, 전기코드는 다 빼졌는지, 물이 얼 것에 대비는 되었는지, 문단속은 잘 되었는지 따위겠지요. 저 사는 곳이 산 밑 외딴곳이라 조금 더 마음이 쓰이기는 한데 시골은 인심이 넉넉하고 빤히 보이는 가까운 곳에 조카들이 살고 있어서 대문 없는 집 자물쇠 없는 문들도 그리 걱정은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식구만 서울을 간 게 아니라 형님 한분과 형수님 두 분도 함께 모시고 갔습니다. 거기에 큰조카 하나까지 합류해서 일곱 명 대식구가 움직이니 번거로운 일도 참 많더군요. 누군가는 한사람 꼭 앞장을 서서 길을 안내해야 하고 일회용 전철 표를 사는 일, 택시를 타려해도 두 대를 잡아서 나눠 타야 하니 자연히 시간은 지체되고 이곳저곳 된정나게 되어 정말 촌티를 아니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찍 서둔 덕분에 퇴근시간의 혼잡을 비켜서 알맞게 서울 조카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앉고 보니 안심하는 마음과 함께 반가운 조카들 얼굴들이 환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애들에게는 연례행사처럼 시골 사는 외삼촌 숙모들이 떼로 몰려와서 부모 생전의 우애들을 드러내니 챙겨야 할 게 많기도 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그들의 친가 쪽은 형편이 닿지 않은지 첫제사 한번을 끝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술상 앞에 하는 이야기들은 어릴 적 외가 집에서의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조카들은 하나같이 어릴 적 몇 달씩은 외가인 저희 집에서 자랐습니다. 누님의 삶이 고단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생전에 달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에 조카들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다 앞가림들을 할 만하니 그게 고맙고 대견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사가 이제는 제사를 넘어 가족끼리의 잔치 비슷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간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커다란 은혜이겠지요. 그런 줄을 알기에 더욱 오가는 말이 따뜻하고 정이 돋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명절보다도 외려 제사가 가족을 더욱 가족이게 하는 듯합니다. 명절이래야 기껏 한 가정의 식구들도 다 모이지 못하기 다반사라 어떤 때는 쓸쓸하기까지 하지요. 남 말하기에 앞서 우선 저희 집만 하더라고 저희 내외와 애들 넷, 많지 않은 식구인데도 명절에 한데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 자기들의 길을 가노란 답시고 멀리 있게 되니 생기는 일입니다. 명절에 꼭 집에 와야 된다는 의무(?)가 제사에 비해서는 강도가 낮게 작용한 달까요? 하긴 제사도 시간의 풍화 앞에는 무기력해지기 마련이지만요.

제사를 지내고 안식구는 아들 녀석을 대리고 딸 셋이 세 들어 사는 집으로 가고 저는 어른들과 함께 제 바로 위엣 누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놀고 새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셋째형님 댁에 가서 또 하룻밤 놀고 새웠습니다. 큰누님과 매형 제사에 시골에서 올라가면 남은 형제들끼리 늘 이렇게 하는 게 말 안 해도 지켜지는 약속입니다. 그런 다음 다들 내려가고 저만은 남아서 딸애들 집으로 갔습니다. 둘째애가 외국을 나가게 돼서 식구끼리 모여 하룻밤 같이 보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역귀성이란 말이 언제부턴가 쓰기 시작해서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아직 명절은 아니지만) 결국은 저희식구가 겸사겸사 역귀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거나 식구들이 다 모이게 되니 참 좋았습니다. 비록 좁아터진 반 지하 전세방이지만 식구들끼리만 있으니 좁은 줄도 불편한 줄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시장에 가서 반찬거리 사다가 먹고 싶은 것 해서 먹는 일, 여기서나 거기서나 아비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온갖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 서울이라 돈 있고 맘 있으면 며칠이건 간에 걱정이 없겠지요. 바깥날이 제 아무리 추워도 나가지 않으면 고만이어서 식구들끼리 영화한편 보려던 것도 그만두고 방안에서 하루를 먹고 뒹굴었습니다. 그대로 일주일만 있으면 살이 다 찔 것 같은, 몸뚱이란 게 참 적응이 잘되는 물건이라 그렇게 겨울 한철 서울 나기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여겨지기도 하더군요. 자식들은 다 제 볼일로 바쁘니 별로 바쁠 것 없는 시골 노인네들, 서울 올라와서 자식들 얼굴 보며 몇 달씩 묵새기는 일, 이제 흔한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흘 밤을 묵고 나흘째 되는 날 집에 내려와서 아궁이에 불을 넣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덥히려는 듯 활활 타오르게 나무를 더 많이 밀어 넣으며 겨울의 침묵으로 다시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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