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야 어떻든 간에 계절은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아 순환합니다. 가뭄이라고 난리 난리쳤지만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저 혼자 태어나 저 혼자 자란 돌 들깨며 자소엽들도 열매를 맺고 잎이 누런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어 말릴 때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지요.

농사철을 모르는 이들을 철부지라고 한다는데 우리 부부는 아마도 전형적인 철부지 농사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집 위에 있는 밭을 빌려 고추농사를 짓는 서 씨 내외와 비교해보면 제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지한 농사꾼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고추는 연작피해가 심한 작물이라 내리 3년을 심고는 올해부터 다른 작물을 심을 수밖에 없다며 이른 봄 전체 밭 절반가량에 도라지씨앗을 뿌리더군요. 올봄도 가뭄이 심해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데 과연 그 씨앗이 싹을 틔울까 괜한 걱정을 했지만 놀랍게도 메마른 대지에 푸른 융단처럼 연녹색 싹을 틔우는 걸 보면 제때 파종을 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는 듯 했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일은 너도나도 들깨모종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가뭄 속에서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얻어왔다며 실하게 자란 들깨모종을 커다란 고무다라에 가득 담아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아직은 말라붙지 않아 졸졸 흐르는 아래 냇가까지 수십 차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물을 길어 올리는 수고는 물론, 땅을 파고 분무기로 물을 붓고 모종을 심는 반복 작업을 하루 종일 하더군요. 땡볕이 내리 쬐는 날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은 제때 모종을 심어야 제대로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본인들만의 신념에서 나왔으리라 추측할 뿐입니다.

다음날 기막히게도 비가 내리더군요. 정말 그렇게 타이밍을 잘 맞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본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옆에서 보는 저로서는 정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밭 가장자리에 모종을 내려고 씨를 뿌려놓고 있었습니다만 노지에서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한 모종들이 실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겨우겨우 싹을 틔우고는 영 자라질 못하니 심을 수도 안 심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됐지만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공간이 나는 밭 이곳저곳에 심기는 했습니다. 이러니 심을 때도 흥이 날 리가 없었던 겁니다.

억지로 심은 태가 여기저기 줄줄 흘렀지만 그래도 세월이 흘러 때가 되니 열매를 맺긴 맺더군요. 그나마 집사람이 부지런히 순따주기를 한 덕에 곁가지가 올라와 열매가 더 맺혔으니 올해 농사는 전부 집사람이 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가을 가뭄이야 지속되건 말건 햇볕이 좋으니 옥수수 고랑사이에 심어놓았던 들깨도, 저 혼자 자란 들깨도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니 하늘의 하는 일은 틀림이 없습니다. 집에서 씨를 심어 늦게나마 싹을 틔워 심었던 영양 수비초 고추도, 장에서 사다 심은 ‘독야청청’ 일반고추도 여름 내내 풋고추를 내어 주더니 빨갛게 익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엉터리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때가 돼 수확을 해야 하는 사실은 변한 게 없습니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자란 들깨며 자소엽도 베어 말려야 하고, 일손이 많은 고추건조 작업도 해야 되는데 덜컥 제발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원래부터 엄지 쪽 발톱이 파고들어가는 내성발톱 증상이 있었지만 심각한 후유증은 없었는데 갑자기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퉁퉁 부어오르며 심한 통증을 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니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을 뒤져 간장요법에 고약요법까지 다 써 보다가 결국 병원을 찾았습니다. 한 30여 년 전에도 이런 증상으로 발톱을 뽑은 적이 있었던 터라 병원처방이 뻔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약 처방만 받아내 며칠 약기운으로 들깨와 자소엽은 다 베고 말리고 털었지만 무리한 탓인지 발가락은 다시 퉁퉁 부어오르고 통증은 심해지고 말았습니다. 슬슬 꾀가 나고 농사일이 하기 싫어지는 마음이 생기니 몸도 따라서 탈이 나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가을걷이를 다 마칠 때까지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소독약이나 수시로 바르면서 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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