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문화, 6차산업화해 잘사는 농촌 만들 것”

“농경문화의 메카인 김제시의 특성을 살려 농업ㆍ농촌을 기반으로 한 문화유산 발굴과 함께, 농업인들의 문화향유와 삶의 질 향상에도 적극 나서겠습니다.”

김선유 한국농촌지도자김제시연합회장은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보릿고개를 넘어 전 국민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하자는 굳은 결심을 한 것.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린나이에 새마을지도자가 됐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최연소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농촌마을 곳곳에 전기를 공급하고, 지붕개량, 마을 안길 넓히기, 마을회관 건립 등 마을환경 개선을 위해 앞장섰다.

또한 김 회장이 가장 열의를 띤 것은 문명퇴치운동이었다. 마을에 배움의 공간이 없어 직접 중학교를 설립해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배움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줬다. 이런 공로로 그는 어린 나이었지만 ‘명예교장’이라는 칭호도 받았다.
배움을 원하는 이들에게 중학교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또한 김 회장에게도 중학교 설립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중학과정에는 영어, 수학 등이 포함되는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농촌에 드물었어요. 더군다나 자금도 여의치 않아 교사를 초빙할 수도 없었죠. 그런데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선뜻 나서서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쳐줬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농촌지도소에 들어가 나도 그들처럼 농촌발전을 위해 봉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 1977년부터 꿈꾸던 김제시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했다. 그는 자칭 ‘농업인들의 머슴’이라며 농촌현장 곳곳을 누볐다. 그는 주야 가릴 것 없이 마을을 돌아다녔다. 갈수록 위축되는 농업에 설움만 깊어지는 농업인들을 위로하고, 농업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김 회장은 지난 2006년까지 35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항상 나 자신보다 농업인을 먼저 생각하고, 주변을 챙겼던 그는 퇴직도 남달랐다. 후배공무원들을 위해 공로연수를 신청한 것. 인사에 숨통이 막혀있던 김제시에서 그의 공로연수 선택은 후배공무원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 하나만 관두면 여러 명의 후배들이 승진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후배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은 퇴직을 서두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평소 염두 해 둔 일이었기에 큰 고민이 없었죠. 이 소식이 김제시에 알려지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관둔 공무원들이 여럿 됩니다.”

김 회장은 공직생활이 끝난 후에도 농업ㆍ농촌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자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에 4-H, 농촌지도자회 등 농업인단체에서 활동하며 농촌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그는 지난 2012년 농촌지도자김제시연합회장에 취임하며 농촌운동의 모태인 4-H를 기리며 4,444,000원을 연합회에 기탁해 귀감을 샀다.

김 회장은 취임 후 농촌지도자회 활성화를 위해 자체사업을 추진했다. 비료ㆍ퇴비공동구입사업을 통해 매년 1천만원을 읍면동별 농촌지도자회 기금으로 활용토록 했다. 또한 내년에는 ‘농촌지도자표’ 브랜드를 도입해 쌀을 공동생산ㆍ공급할 계획이라고.
김 회장은 농촌지도자김제시연합회 수장 외에도 또 다른 직함하나가 있다. 바로 ‘김제시문화원장’이다.

“모두들 문화원장이 됐다고 했을 때 ‘농업인이 무슨 문화냐’며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농업인이라서 더욱 문화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경문화의 고장인 김제에서 농업을 빼놓고서는 문화를 얘기할 수 없으니까요.”
김 회장이 문화원장에 당선된 것은 파격적이었다. 기존의 문화원장들은 문예가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 관례처럼 돼왔기 때문이다.

“김제에서는 문화를 살리는 것이 농업을 살리는 것이고, 농업을 살리는 것이 문화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김제에서 농업과 문화는 같은 맥락에 있죠. 선진국일수록 농업ㆍ농촌을 기반으로 문화유산을 발굴해 역사문화관광사업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농촌과 문화를 접목해 6차 산업화시켜 농업인이 행복한 농촌을 만드는데 앞장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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