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필요한 물품을 그런대로 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대략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 동네는 그 유명한 ‘무릉계곡’으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인 지라 제법 가구 수도 많고 몇 개 동(洞)을 아우르는 주민센터도 규모가 꽤 큽니다. 주민등본이나 기타 필요한 서류를 떼려면 물론 이곳까지 와야 되지요. 상설시장도 있고, 중국집을 비롯한 식당도 몇 군데가 있어 멀리 시내까지 나가지 않아도 다급한 상황은 해결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병의원이 없어 두 군데 있는 약국이 의료보험예외지역의 혜택을 누리는 특이한 동네이기도 합니다.

들기름, 참기름을 짜거나 고춧가루를 빻기 위해 늘 들리는 곳이 ‘연호당’이라는 의미가 있을 법한 간판을 건 방앗간입니다. 하루 종일 주인장은 바쁩니다. 작은 키에 안경을 끼고는 있지만 탄탄한 몸을 지니고 있는 약간은 과묵한 사람입니다. 오래된 기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방앗간은 고추의 매운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 그리고 떡을 찌는 냄새까지 섞여 정말 오묘한 냄새의 조합이 방앗간다운 곳입니다. 워낙 기계들에서 나는 소음이 심한지라 오래 있기에는 힘든 점이 많지만 이 과묵한 주인장은 손님이 많을 때는 반드시 자기가 맡긴 게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라고 당부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씩 웃으며 가끔 남의 물건을 제 것인 양 바꿔치기 하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아직 총각이라는 주인장은 혼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놀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힘든 점이라고 미소를 띱니다. 그래서 그런지 데이트하기가 어려워 총각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더군요. 하기야 촌에서 노인네들이 주말이라고 특별히 주인장 생각을 해주지는 않으니 적어도 오전까지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주말에 일 끝나면 목욕탕가서 씻고 친구들과 술 한 잔하는 게 유일한 낙이라니 벌이는 괜찮아도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는 말이 수긍이 갑니다.

시골에서 방앗간은 거의 모든 작물을 분쇄해 가루로 만들거나 압착기로 눌러 기름을 짜고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 떡도 쪄야 되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상업용으로 건조기를 운영하는 곳에서도 곰팡이 피고 거의 썩어가는 고추를 말려달라고 하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더니 방앗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완전히 건조되면 일반소비자들이 육안으로는 식별하기가 어려워 장터에서 사온 이런 고추를 빻아달라면 주인장은 뭐라 말도 못하고 속상하다고 합니다. 소비자야 몰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고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자리를 비우면 바쁜 주인장이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틈을 타 좋은 물건과 바꿔치기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벌이가 되면 양심을 버리는 행위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먹을거리마저 이래서야 언젠가는 ‘세월호’사건보다 더 어마어마한 국가적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썩어가거나 곰팡이 핀 농산물을 말리고 빻는 사람이 자가소비를 위해서 이런 행위를 하지는 않겠지요. 소비자를 속여 일단 돈이나 벌면 그만이라는 행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원산지가 국산이라는 표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보장하는 시스템이 어떤 예외조항 없이 절대원칙인 나라가 돼야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의 눈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사회의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원칙이 지켜져야 국가 전체가 원칙으로 굴러갈 수 있지, 작은 구멍이라고 등한시했다가는 호미로 막을 걸 가래라도 못 막는 법입니다.

작은 동네에서는 이런저런 지연, 학연, 인연 등으로 원칙을 지키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당당하게 잘못을 일러주도록 하려면 제도가 확립되면 됩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몸에 밴 주인장이 올해는 장가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줄는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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