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들인 농사, 순식간에 빚더미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말도 안 나와. 어떻게 하루아침에….”
경기도 이천시에 지난 10일 오후 5시 반경 ‘우박 폭탄’이 떨어졌다. 매실크기 만한 우박은 30분가량 쏟아졌다. 농업인들은 눈앞에 자식 같은 작물들이 피해를 입는대도 어마어마한 우박세례에 손 쓸 수 없이 당해야만 했다.
우박으로 과수는 대부분이 낙과했고, 농경지는 쑥대밭이 됐다. 수확을 코앞에 둔 상황이라 농업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쳐다보면 한숨만…“어디서 어떻게 손대야 하나”

▲ 지난 12일 김성응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장은 이천시를 찾아가 우박 피해 현장을 둘러봤다.
“매실크기만한 우박이 우수수수 쏟아져 걱정되는 마음에 밭에 나가려 한 발자국 내딛었는데 몸에 떨어지는 우박이 어찌나 아픈지 더 이상 발을 땔 수가 없더라고. 나무에 앉아 있는 참새들도 우박에 맞아서 죽어나갈 정도였다니깐. 하염없이 창밖에만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마을 어귀에서 9천여㎡ 규모의 복숭아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원종문 씨(63)는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복숭아를 쳐다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원 씨의 복숭아나무는 성한 것을 찾아볼 수 없이 망가져있었다. 복숭아가 담겨 있는 노란 봉지는 땅에 나뒹굴고 그나마 나무에 달려있는 복숭아도 봉지를 열어보면 우박에 맞은 상처로 성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뭇잎 몇 개만 남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복숭아나무도 더러 있었다.

“올해 농사는 끝났어. 복숭아가 우박에 다 떨어지고 그나마 붙어있는 것도 멍투성이니 이걸 어디에 팔겠어. 6개월 동안 헛짓 한 거지 뭐. 우박오기 4일 전에 봉지 씌우기 했는데, 그 값만 5백만 원 들었어.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는지…. 올해는 그렇다 쳐도 내년에도 수확할 수 있을지 몰러.”

원 씨는 바닥에 나뒹구는 복숭아를 치우고 복숭아나무에 약을 치고, 영양제를 살포하고 있었다. 우박으로 복숭아나무 열매는 물론 나뭇가지에도 상처가 생겨 2차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 2차 피해가 발생하면 내년 수확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 씨는 작은 희망을 갖고 나무를 관리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과수 2차 피해 우려…“상처받은 나무, 잘 버텨주길”

▲ 우박으로 떨어진 복숭아와 원종문 씨(오른쪽)
“나무에 상처가 생기면 진이 나오는데 병충해들이 그 진을 먹으려고 벌떼처럼 몰려오지. 그러면 그 나무는 끝이야. 죽는 거지. 안 그래도 이상기온으로 병해충 발생률이 높아져 비상인데 여기저기 난 상처 때문에 병해충 피해가 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냐. 병충해 피해가 생기는 나무는 고사해 베어낼 수밖에 없어. 혹시나 내년에는 수확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로 병해충 약을 치고 있는데, 장담은 못 허지. 그래도 굶어죽을 순 없으니 어쩌겠어.”

원 씨는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제발 복숭아나무가 잘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에게 복숭아나무는 생계수단이기도 하지만 12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최악의 경우 나무가 고사돼 베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원 씨의 걱정은 크다. 병충해로 인해 고사되거나, 나무 이곳저곳에 난 상처를 버티지 못하고 고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만약 이렇게 돼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나무를 심어야 한다면 나무가 온전히 커서 정상수확 가능한 3~4년 동안은 제대로 된 수확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남은 건 빚진 생산비와 가지만 앙상한 농작물

우박 피해는 비단 원 씨만의 일이 아니었다. 다른 논밭도 모두 쑥대밭이었다. 어마어마한 핵폭탄을 맞은 듯,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듯 초토화된 모습이었다. 그나마 앙상하게 남은 가지만 남아있었다.
이재분 씨(62)는 8천2백㎡에 고추, 옥수수, 감자 등을 심었고, 이제 곧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 사라졌다. 고추는 앙상한 가지만 남았고, 옥수수는 녹아내린 듯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감자도 잎은 찾아 볼 수 없고 우박으로 땅이 패여 밖으로 고개를 내민 감자로 인해 감자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씨는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라며 애써 웃어 보였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의 몸이 성치 않아 홀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왔지만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며 깊 한 숨을 내쉬었다.

“그날(우박오던 날) 뉴스에서 비가 온다고 해서 고추가 쓰러질까봐 노끈으로 고정시켜줬지. 우박이 내릴 줄 어찌 알았는가. 보면 안쓰럽고, 속상해서 밭에 오기도 싫어. 그래도 먹고 살라면 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엄두가 안나. 애써 키운 거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서 의욕도 없어. 뭔 힘으로 농사짓것어.”

이 씨는 농사를 다시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박으로 비닐피복제까지 다 뚫려 피복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아끼고 아껴 덮은 비닐피복이지만 이마저도 쓸모없게 됐다. 특히 임대농인 이 씨는 한철농사를 망친 상태에서 농지임대료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답답한 심정이다.

#우박피해 고스란히 떠 안은 농가…살길 막막

쑥대밭이 된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일손을 놓은 상태다. 한 참 바쁠 농번기임에도 마을회관 앞 정자에 모여 멍하니 밭을 쳐다만 보고 있다.

한 어르신은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여. 내가 80평생을 이 동네에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참깨, 들깨, 고추, 오이…이 동네는 남아난 것이 없지 뭐. 전에는 텃밭에 있는 농산물로 충분히 한상차려 먹었는데, 이젠 내 돈 주고 장에 가서 사먹어야 되” 라고 말했다.

특히 원 씨, 이 씨, 그리고 마을주민들 말에 따르면 이 일대는 우박피해가 빈번한 지역이 아닌 탓에 상당수 농업인들이 농작물 재해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이번 우박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고스란히 농가에서 떠 안게 됐다.

이천시농업기술센터 정중화 기술보급과장은 “피해 지역을 돌아보며 피해 상황과 규모를 살펴 본 뒤 우박으로 인해 농작물 피해를 입은 농가에 대해 신속한 복구와 보상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정 과장은 “농작물 재해보험에 가입이 안 돼 있다면 우박피해로 인한 것은 농약대 정도로 규정돼 있다”며 “30ha이상이면 재난지역으로 선포돼 보상금을 더 받을 수 있겠으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10일 내린 우박은 이천시뿐만 아니라 경기도 안성, 용인, 화성, 포천,  강원도 횡성, 평창, 철원, 충북 충주, 음성 등에 피해를 입혔다. 피해면적만 총 707.1ha.
이동필 장관은 지난 13일 강원 횡성군 둔내면 농작물 피해 현장을 방문해 “조기에 피해 농작물을 복구해 영농을 재기할 수 있도록 동원 가능한 인력ㆍ장비 등을 최대한 지원토록 하겠다”면서 “농식품부도 농약대 등 재해복구비 외에도 재해대책 특별융자금 등 복구지원 예산이 최대한 지원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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