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브랜드만큼 허세부리고 과장되게 네이밍을 하는 품종도 드뭅니다. 첫해 그저 풋고추나 따먹자는 마음으로 10포기 정도 심었던 고추가 그럭저럭 잘 돼 집사람이 갑자기 자신이 생긴 모양입니다.
봄날 장날은 온갖 모종과 묘목, 씨앗은 물론 각종 편리하게 고안된 농기구들이 손님들의 눈길을 끕니다. 그중에서도 종묘사 문전은 그야말로 문턱이 달 정도고 주인장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분주하기 짝이 없습니다.

‘독야청청’, ‘기대만발’, ‘다다익선’ 등 등. 이 그럴듯한 4자성어로 명찰을 건 모종들이 고추브랜드들입니다. 사실 농사로 잔뼈가 굵은 이들에게 명찰이야 큰 의미가 없겠지만 초보자인 우리들 눈에는 이름이 쏙쏙 들어오더군요.

‘독야청청’, ‘기대만발’을 주종으로 청양고추, 아삭이고추, 당뇨고추, 파프리카까지 몇 포기씩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고추와의 지루하고 힘든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지지대를 세우고 줄을 몇 차례씩 매어주는 일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덤벼드는 진딧물이나 탄저병과 역병을 이겨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농약 안치고는 절대 고추농사 질 수 없다는 주위 분들의 의심의 눈길을 극복하려면 뭔가 대책을 세워야 가을에 무농약 태양초를 수확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이랑 사이 규격도 잘 몰라 관행보다 넓게 잡았다고 핀잔을 받았지만 그거야 지나다니며 작업하기 편리하니 오히려 좋더군요. 어쨌든 가깝게 고추농사에 경험이 많은 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긴 했습니다만 그분도 때 되면 농약 쳐야 안심하는 분이니 그저 귓등으로 흘리고는 인터넷과 어찌어찌 주워들은 정보로 매실액과 사과식초를 혼합해 농약대신 쳤더니 다행히도 고추는 병 없이 잘 자라 주었습니다. 20리터 분무기를 메고 수동으로 혼합액을 쳐주는 일은 한여름 뙤약볕에 정말 죽을 맛이긴 했지요. 그래도 가을햇살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마당에 널린 풍경이야말로 전원생활을 완성하는 그림이려니라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100년 만의 가뭄이라는 여름을 무사히 지나고 드디어 고추가 실하고 근사하게 익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분들도 초보자가 고추농사를 이렇게 잘 졌느냐고 칭찬이 자자하니 그만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사실 문제는 고추는 기르기도 힘들지만 말리기가 더 힘들다는 걸 몰랐다는 거지요. 살이 두껍고 커다란 홍고추를 따면서 의기양양했었건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고추 망을 폈다 거뒀다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찌푸린 하늘 아래서는 겉으론 멀쩡해도 속으로 곰팡이가 피기 일쑤였고 아직 보일러를 켤 시기가 아님에도 보일러까지 가동시켜 온방을 고추로 가득 채우기도 했지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날이 궂으면 고추건조용 구들방에다 뜨끈뜨끈하게 불을 때야만 제대로 말릴 수 있는 걸 미지근한 보일러로 말리려 했으니 괜한 헛고생만 한 셈이지요.

웬만큼 말랐다고 여겨지는 고추도 가위로 잘라보면 속에 곰팡이가 폈으니 그만 집사람도 어이가 없는지 집어던지더군요. 이렇게 내다버린 고추가 몇 십 킬로가 넘을 겁니다.
서울 사는 지인들에게 선주문을 받기로 했다며 좋아하던 집사람도 그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상업적으로 건조기를 운영하는 곳을 찾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양초의 꿈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겨우겨우 순수하게 햇볕에 말린 게 대략 서너 근쯤은 됐으니 그게 어딥니까. 그러나 우리만이라도 태양초를 먹어보자는 바람도 방앗간에서 헛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손으로 절구에 빻기 전에는 기계에 넣을 양이 되지 않으니 섞어서 돌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로 끝. 태양초는 물 건너가고 농약 안 친 고춧가루라도 건졌다는 마음의 위안으로 고추농사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지주대 세우고 줄 매고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일일이 포기마다 빵 묶는 철끈으로 고리를 만들어 고정시켰던 고생도 이렇게 끝이 났지만, 터무니없이 싼 고추 값에 전업으로 재배했던 농부들의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그게 더 안타깝습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