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숲, 지저귀는 산새들의 화음, 계곡을 감싸 흐르는 맑은 물, 평화롭게 산속을 거니는 산짐승들, 대도시 아파트 거실에 앉아 TV채널이 소곤거리며 세뇌시키는 멋진 그림입니다. 때론 멧돼지조차 이 그럴듯한 풍경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고화질 텔레비전 화면 속 그림이 그저 좋은 그림일 뿐, 농촌현실은 반영치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순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노루나 고라니가 예뻐 죽는 사람들은 TV동물농장 애호가들이고, 농촌 어르신들에게는 때려잡아도 시원찮은 못된 애물단지가 된지는 이미 오래 됐으니까 말이지요.

콩 순이 올라올 즈음 산비둘기는 어찌 그리 때를 잘 맞춰 새순을 잘라먹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낮 시간 동안은 그나마 밭에서 일을 하며 새들을 쫓아낸다고 해도 밤사이에 벌어지는 고라니의 습격은 막을 방도가 별로 없습니다. 그놈들도 입맛이 까다로운지라 꼭 연한 새순만 드시니 콩이고 팥이고 순이 잘린 작물들이 제대로 자랄 턱이 없지요. 환경부가 이놈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는 걸 아는지 때론 대낮에도 나타나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며 약을 올리기도 하니 ‘미워도 다시 한 번’식으로 용서하기는 정말 어렵지요.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책이 없으니 그게 더 답답할 따름입니다. 법이란 게 일률적 규제 일변도니 지방자치단체가 해 줄 수 있는 정책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철제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고압전기를 이용한 퇴치용 울타리를 치고자하면 일부 보조를 해주지만 이마저도 워낙 조건이 까다로워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많은 돈을 들여 방지울타리를 친다 해도 멧돼지의 습격을 막는 문제는 또 다른 일입니다. 고라니는 고압전기 충격에 무디고 돼지는 효과가 있지만, 고라니는 울타리를 뛰어넘고 돼지는 밑을 파고 들어오니 어지간한 높이거나 바닥을 콘크리트로 막지 않고서는 효과가 별로니 이도 확실한 방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완벽한 울타리를 칠 농가가 어디 그리 많겠습니까.

콩밭을 망친 돼지들이 피치 못할 일로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옥수수 밭마저 완벽하게 초토화 시켜놓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가관이 따로 없더군요. 옥수수 대를 죄 넘어뜨려 잘 익은 열매만 먹어치우고 덜 익은 열매는 먹지도 않고 짓밟아 놓았으니 그 처참함에 그만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멧돼지로 인한 피해는 농작물에 그치지 않고 때론 인명사고도 일으킬 수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100kg가 넘는 덩치 큰 돼지가 웬만한 바위도 밀쳐버리는 힘으로 사람에게 덤벼들면 사실 오금이 저려 도망도 제대로 칠 수 없을 정도라니까요.

결국 제일 확실한 퇴치법은 포수가 총으로 사살하는 방법이지만 신고를 받고 출동한 포수들이 총을 휴대할 수 있는 시간이 저녁 8시에서 새벽 4시까지로 제한돼 이 방법도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콩밭과 옥수수 밭 피해상황을 조사한다고 시청 환경과에서 줄자와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긴 했지만 뭐 특별한 대책이 있었겠습니까. 포수가 두 차례 정도 잠복했지만 돼지잡기는 실패했고, 그 뒤로는 밤에 밖에 나가는 일은 가급적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당방위는 사람간의 관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농작물을 지키려는 이들이 야생동물과 싸우는 일도 정당방위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유효기간이 표시된 올무를 설치하는 것이 그나마 농작물을 지키는 최소한의 자위책이긴 합니다만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누가 뭐래도 최상위의 정책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유연성이 결여된 경직된 정책만으로는 허리 굽은 농부들의 한숨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환경과에서 피해조사를 했다는 사실 조차 잊혀져갈 무렵 보상금이 나온다며 계좌번호를 제출하라기에 부리나케 시청까지 차를 몰고 나갔다 왔더니 거금(?) 8만원이 입금됐더군요. 이게 기름 값이나 보태 쓰던지 알아서 하라는 보상책의 끝단이니 그저 헛헛한 웃음밖에 나올 게 없는 게 오늘의 농촌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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