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농업인·시인

날씨가 갑자기 여름이 온 것처럼 사나흘 덥습니다. 그동안 일교차는 많았어도 날씨가 이렇게까지 갑작스럽진 않았는데 이건 너무 심하다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러니 밭둑의 풀들도 하루사이에 대궁이 다 무릎까지 자랐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금방 또 등에 예초기 둘러매고 풀 깎는 일에 시간 보내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나다니며 보면 들녘은 지금 고추 심느라 사람들이 바삐 움직입니다. 신문의 발표엔 고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해마다 큰 폭으로 줄고 있다고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재배 기간이 긴데다가 일손이 많이 가고 해마다 병충해가 더욱 기승을 부리니 그럴 수밖에요. 그래도 ‘오뉴월 화톳불도 쬐다 말면 섭섭하다’는 식으로 그만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선지 이곳 분들은 때 되면 그렇게 고추에 매달립니다. 딱히 할 농사가 없는 탓도 있겠지요. 몇 년 전 고추를 포함해서 외국 농산물을 엄청나게 수입해올 때 한 일간지 만평엔 고추나무에 고추처럼 힘들게 매달려 있는 농민이 그려져 있던 게 생각납니다. 지문엔 관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저 양반들 왜 지금도 저기 매달려 있지?’ 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민들의 그 사정이 지금이라고 하여 나아져 보이진 않는데 날이 따뜻해지니 고추 심는 일손들이 뜻도 없이 바빠 보입니다.

저는 양파 때문에 마음이 심란합니다. 연작의 이유가 크겠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일찌감치 병이 찾아왔습니다. 균핵병도 아니고 노균병도 아닌듯한데 잎에 검은색의 곰팡이 같은 게 끼어서는 노랗게 오그라지며 말라갑니다. 병충해 도감을 살펴보면 이름도 우스꽝스런 주꾸미병에 가까박 형 진  농업인·시인워 보입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것들이 단 며칠사이에 부쩍 번져서 일주일 전쯤엔 미생물제제를 한 번 뿌려주기도 했습니다. 눈에 조금 차도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러기를 바라는 제 마음의 착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약을 두 번은 더 뿌려볼 생각입니다. 비싸기는 오지게 비싸도 효과는 별 볼일 없는 것이 이것인데 뭐든 삼 세 번이랬다고,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지요. 300평 양파에 흠뻑 뿌려 주는데 등에 짊어지는 한말들이 약통으로 열두 번은 해야 합니다. 열두 번 아니라 스물두 번도 사람에게 해로운건 아니니 상관없지만 왼손으로 펌프질 해대기란 죽을 맛입니다.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몇 년째 아픈 팔뚝이 위 아래로 힘을 쓰는 건 그래도 조금 괜찮지만 저번에도 여섯 통쯤 뿌리고 나니 견딜 수 없어서 이틀에 걸쳐 했습니다.

그새 풀은 또 자랄 만큼 자랐습니다. 아내와 제가 오늘로 사흘째 매고 있는데요, 앞으로 하루는 더 해야 될 것 같군요. 풀을 매긴 해도 재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양파 밭이 정상이라면 우죽이 시퍼러니 땅을 덮어가서 풀 따윈 힘을 쓰지 못할 때입니다. 뽑아서 우죽 나물을 해도 좋고 큰 것은 김치를 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어서 새들새들 하기만 하니 꼭 죽은 자식 그것 만져보는 격으로 풀 뽑다가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점심 먹고 방에 잠깐 들어 누워 TV를 켰습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 보니 낯익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 한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박중훈과 이름은 모르는 여배우 주연의 <내 깡패 같은 애인>이란 영화였습니다. 깡패 똘마니 정도나 되는 박중훈의 신산스러운 모습도 그렇지만 그 옆방에 멋모르고 세 들어와 사는 여배우의 생활도 말이 아니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이 안쓰러운데 둘은 이런저런 일로 부딪히며 조금씩 상대와 관계를 넓혀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여배우는 취직을 하기 위해서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니고 박중훈은 깡패 두목이 운영하는 유흥업소의 전단지나 붙이고 다니는데 제 눈에 뜨인 건 면접을 보던 여주인공이 비인간적인 모멸을 당하고 또 취직을 미끼로 성 접대를 강요받는 대목이었습니다. 순간 제 눈엔 큰 딸애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바리스타인지 뭔지 하는 학원을 다니면서 밤으로는 알바를 하는 모양인데 이제는 자격증을 따게 되어서 커피 전문점에 직장을 구하러 다닌다고 엊그제 전화가 왔었습니다. 저는 그만 가슴이 답답해져서 TV를 끄고 제 옆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린 아내를 놔둔 채 밖에 나가 호미를 찾아 쥐고 양파 밭에 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영화 속 그 장면들을 지워버리려 애를 쓰며 한동안 풀만 뽑아 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 말대로라면 저의 이 풀을 뽑는 행위가 거기에 해당 되겠지요. 저는 조금 달리 말해서 제게 이 병들고 풀 우거진 양파 밭이나마 없었다면 이럴 경우 어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산으로 헤매거나 바닷가를 거닐거나 아니면 주막에 혼자 앉아 있을까요? 제게 농사는 위안이기도 하며 헤어날 길 없는 족쇄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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