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저와 제 아내는 아침을 일찍 먹었습니다. 내외 둘만 있으므로 평소에는 일곱 시 쯤에 일어나서 여덟 시 반 무렵에 아침을 먹습니다. 그 시간대에 TV에 즐겨보는 휴먼 다큐가 방송되기도 해서, TV에 눈 대고 웃고 참견하면서 밥을 먹는 게 겨우내 이어져 왔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조금 서둘렀습니다. 커피도 저만 얼른 한잔 타 마셨습니다. 제 아내는 밥 먹고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지나서 먹습니다. 어디서 식후에 바로 먹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읽어서 일 것입니다. 커피 종류도 달라서 저는 누가 사다준 믹스커피를 먹고 아내는 크림 설탕을 넣어서 타는 커피입니다. 물론 제가 아침마다 타서 바치는(!) 것인데요. 오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연장을 꺼내다가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어제 갈아놓은 텃밭에 길고 넓적한 두둑을 하나 만들어 놓는 일입니다. 작년 가을에 딸기모종을 옮겨야 하는데 게으름을 부리다가 때를 놓치고 봄으로 미뤄놓은 일입니다. 봄에 옮기면 그 해에 딸기를 제대로 따 먹을 수가 없지만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옮기고 거름 듬뿍 주고 비 후북히 맞으면 반 구실이야 하겠지요. 저는 일을 한번 손에 잡으면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경운기로 한 번 삭 갈았다고는 하지만 50m쯤 되는 이쪽 밭둑에서 저쪽 밭둑 까지 쉼 없이 괭이질을 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오직 젊었을 때 버릇처럼 그렇게 하고는 지쳐서 헐떡거리지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 성이 풀리지 할 일 놔두고 뭉그적거리지를 못합니다. 일을 하는 방법도 막고 품는 식입니다. 일 한 가지하는데 편하려고 이것저것 기계 끌어대고 하느니 그냥 몸으로 하는 식입니다. 그러다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겨우내 이쪽저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아팠던 팔뚝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 어깨가 삐끗하며 또 아픈 신호를 보내와서 좀 천천히 쉬엄쉬엄 했습니다. 지금이야 일하는 낮이니까 참고 하지만 저녁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먹으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성질은 죽지 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마음과 몸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몸에 성질이 맞춰지는 것일까요? 그 다음에는 콩대를 뽑았습니다. 작년에 심은 콩인데 고라니가 새순이 나오는 족족 뜯어 먹어서 콩 한줌 손에 쥐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콩대도 뽑지 않고 놔둔 채 겨울을 났습니다. 덕분에 냉이가 많이 나서 콩 대신 냉이만 봄에 실컷 캐먹었습니다. 하지만 가을에 갈아두지 않은 밭이라 냉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풀까지 어찌나 많이 올라오는지 지금 갈아엎지 않으면 감당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지기나 되는 밭의 콩대를 뽑아냈습니다. 땅이 메마르고 흙살이 얇아서 이곳은 비 오자마자 갈아엎을 생각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갈고 나서 심을게 마땅찮아 고민이 됩니다. 물론 고추는 조금 심을 계획입니다만 몇 년을 두고 허탕 치다시피 해서 고추만 생각하면 재미가 없고 풀이 죽습니다. 고추가 잘 돼서 그야말로 가지만큼씩이나 크고 붉은 고추를 따는 일은 쉬지 않고 해도 재미가 져서 고된지 모릅니다. 그것이 한여름의 뙤약볕을 견디게 해주기도 하는 것이지요. 여름 밭농사는 고추가 가장 중요한데 몇 십 년 농사를 짓고도 자신이 없으니 탄저병이 저보다도 훨씬 센 녀석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겨울을 지낸 밭에는 정리해야 될게 많습니다. 밭둑을 태워 버려야 할 곳도 여러 군데입니다. 하지만 제 밭이 죄다 산과 맞닿아 있어서 낫으로 베어내야 합니다. 태우게 되면 병이나 해충의 알도 죽겠지만 익충의 알들도 함께 죽습니다. 그러니 일이 더디어도 어쩔 수 없이 이것도 막고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러는 동안에 멀리서 눈여겨보니 제 아내도 바쁩니다. 딸기는 다 심었는지 그릇을 옆에 끼고 다니며 거름을 줍니다. 밑거름도 갈 때 충분히 뿌렸지만 깻묵 빻아놓은 것으로 위에다 또 뿌려주라고 시켰습니다. 제가 시키지 않아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딸기 따먹을 욕심은 저보다 많을 테니까요. 그런 다음 상추 씨앗을 뿌리겠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구멍이 적은 참깨나 양파 육묘포트에 모종을 길러서 본판에 옮겨 심는 게 여러 가지로 좋겠는데 어떻게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봄은 뭐라고 해도 농부의 계절입니다. 일찍이 작고한 오윤의 작품 중에는 ‘춘무인추무의’라는 제목의 판화 한 점이 있습니다. 풍물을 치며 돌아가는 농악대의 깃발 속에 제목과 같은 글귀가 박혀 있는데 자세한 뜻을 몰라 그만 제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봄에 어짊이 없으면 가을에 의로움이 없다. 농부가 봄에 씨 뿌림이 어짊과 의로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비 앞에 두고 저희는 오늘 고단하게 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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