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관용을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복날이면 으레 개고기 먹는 날로 알았다. 삼계탕과 함께 삼복에 먹는 대표 보신음식 개장국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먹어온 시절음식이요, 보릿고개에 허기를 달래주고 양기를 북돋워주던 토종음식이다.

그런데 해외언론에서 우리를 개고기 먹는 ‘야만의 나라’라고 떠드는 바람에 한 때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의 고유음식으로 조금씩 인정을 받고 있다.

1997년, <뉴욕 타임스>가 ‘개가 애완용 혹은 식용이 될 수 있는 나라’라고 우리를 비판하자,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뉴욕 타임스> 편집자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을 통해 한국인의 고유 생활양식과 전통을 무시한 편향된 시각의 보도라고 반박하면서 ‘모든 문화는 각자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누구도 그 가치의 우열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사람들이 말고기를 즐겨먹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뉴욕타임스>측이 모르고 있는 점은 모든 아시아 국가들 역시 고유의 음식 취향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의 문화는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도 자기중심적 사고로 타국의 문화를 폄하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지난해 말 산케이신문의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의 비빔밥을 비하하는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이 땅에 오랜 동안 살아온 사람도 우리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구나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부) 일본인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 특별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 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선망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일본은 일본 청주 ‘사케’ 세계화에 있어서도 서구 주류를 선도하고 있던 와인을 모델로 하였다. 사케를 ‘rice wine’으로 표현하고 품질 표준화, 등급화 등의 일련의 작업도 와인을 벤치마킹하여 마케팅에 활용하였다. 일본 국세청에서는 향, 원료, 제조법에 따라 사케의 등급을 매겨놓았으며 고가의 사케는 와인처럼 일련번호와 함께 제조회사, 제조산지, 출하연도, 도수, 재료명 등의 라벨이 붙어져 있다.

이렇듯 일본인들의 인식 저변에는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반면 경제적으로 못 사는 나라 아시아를 ‘문화의 후진국’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문화의 후진국’이란 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문화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문화가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잣대로 문화의 우열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고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는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의 정의다.

 문화인류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타일러는 자신의 저서 「원시문화」에서 문화를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했다. 문화는 자유의 실현이며 창조의 산물이다. 문화는 삶과 사유의 방식이고 삶의 질과 직결된다고 하였다.

프랑스 문화부 홈페이지에 보면 ‘문화는 자유를 실현하는 장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국기에 대한 맹세’ 일부가 수정되었는데 ‘자유롭고 정의로운’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우리사회가 그만큼 관용과 다양성이 뿌리를 내린 민주적인 사회,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서로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할 때 자국의 문화도 빛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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