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우리나라 특유의 음식이다. 족편처럼 동물성 젤라틴을 굳힌 음식은 세계에 제법 있지만, 묵처럼 녹말을 굳혀서 먹는 음식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다.

또 묵은 우리에게 친숙한 서민음식이다. 묵의 재료가 되는 도토리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묵을 많이 만들어 먹었다. 묵이 들어간 ‘묵사발’이란 일상용어도 있다.

옛날 새벽이면 들리던 ‘메밀묵 사려!’ 하는 소리를 기억하시는지. 필자는 지금도 어쩌다가  ‘메밀묵 사려!’ 외치던 묵장수의 낭랑하면서 정감 있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묵은 여러 가지 녹말재료로 만들 수 있지만 구황식품으로 조상들이 즐겨 먹었던 메밀묵과 도토리묵이 최고다.

메밀은 이미 조선시대 세종 때 펴낸 「구황벽곡방」에 구황작물로 기록될 만큼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해 온 작물이다. 메밀은 여느 곡식에 비해 단백질이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 B1, 비타민 B2, 나이아신 등이 있어 영양가가 높다. 밥에 섞어 먹으면 영양뿐 아니라 밥맛을 좋게 한다. 또 루틴이라는 성분이 있어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등 성인병 예방에 좋으며 저칼로리 음식으로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메밀은 갈아서 묵을 쑤거나 냉면의 원료인 메밀국수를 만들거나 한다. 메밀묵을 만들 때에는 메밀을 미리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 후, 껍질을 벗기지 않고 통째로 맷돌에 갈아 물을 부어가며 체로 걸러낸 다음 웃물을 따라내고, 밑의 앙금으로 풀을 쑤듯이 끓이는데 이 때 묽기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물을 조절해가면서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며 잘 끓이다가 그릇에 담아 식히면 묵이 된다.

이처럼 껍질째 물에 불려 갈아 묵을 쑤어 얼추 도토리묵 비슷해 보이나 검정빛이 약간 도는 빛깔이 나는 것을 ‘강태묵’이라 하며 예부터 메밀묵은 강태묵이라야 진짜 메밀냄새가 나서 맛이 구수하다는 말이 있다.

메밀묵은 겨우내 서민들의 배를 채워 주던 음식이며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겨울밤에 즐겨먹던 추억의 음식이다. 이것을 채 썰어 묵은 김치, 숙주, 쇠고기, 표고버섯, 멸치장국을 넣고 끓인 메밀묵채는 깔끔한 맛을 주는 음식으로 명절날 먹으면 별미이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서 즐겨먹었으며 이 지역의 전통반가음식이라 할 수 있다. 메밀묵 대신 도토리묵으로 만들기도 하고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넣기도 한다. 여기에 밥을 넣으면 메밀묵밥이 된다.

한편 도토리가 우리나라에서 식용으로 쓰인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충선왕이 흉년 때의 백성들을 생각하여 도토리를 맛보았다는 일화는 도토리가 대표적인 구황식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토리묵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렸던 한국전쟁 기간까지 많이 먹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빈곤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다른 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수요가 감소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도토리묵은 건강식품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수분의 함량이 많아 포만감을 주면서도 칼로리가 아주 낮아서 다이어트 음식이 되었다. 도토리 속의 쓴맛 성분인 탄닌은 항산화제로서 노화방지 등 여러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한다.

또 도토리에 들어있는 아콘산은 인체 내부의 중금속과 여러 유해물질을 흡수해서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작용을 하고 피로 회복 및 숙취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고픔의 상징이었던 도토리묵은 오늘날 영양과잉, 환경오염 시대에 오히려 웰빙 요리가 된 것이다.

예전에 먹을 것이 많지 않았으나 묵이 흔하던 시절, 그때는 묵으로 여러 가지 요리를 해먹었다. 볶음, 무침, 전, 탕 등등. 요즘은 묵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으나 요리법은 예전만큼 다양하지 않은 듯하다. 묵무침만 자주 접할 수 있다. 외식 또는 단체급식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묵무침은 대부분 간장에 갖은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그러나 1800년대 쓰인「시의전서」에는 메밀묵은 간장이 아닌 소금으로 간하고 고춧가루와 참기름, 깨소금, 채 썬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무쳐 담을 때에 김을 설핏 부수어 섞는다고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음식도 조리법도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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