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CEO가 친환경 농법으로 고품질을 대량생산 한다.” 현재 정부가 농업정책의 비전으로 제시한 말이다. 일반 농사와 달리 친환경 농법은 품목을 불문하고 농가당 재배면적이 1ha를 넘지 못하는 게 상식이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는 것보다 사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MB정책대로 추진하자면 일단 구조조정은 가속패달을 밟을 것이다. 중소농의 퇴출과 농기업 육성방안이 그것이다. 국내 300만정도의 농가중 60%이상인 영세농이나 고령농 등이 곡괭이를 내려놔야 한다. 대단위의 유기농법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이 후의 일이다. 일단 많은 이들이 농사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MB정책이 계획대로 추진됐을 때 우리의 농촌은 어떤 모습일까. 말그대로 유기농업에 프리미엄 마케팅이 가세하고, 10만 CEO가 부농으로 살아가는 곳으로 변모할까. 몇몇 스타농부는 분명 탄생할 것이다.
경쟁력으로 맞붙는 시장논리에서 소수의 강자는 살아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허나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다. 스타농부를 부럽게 바라보는 인생이 될 뿐. 일반적인 농민입장에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봤다.


▲ 농업과 농촌이 정부의 계획대로 산업적 개념의 발전을 도모한다면, 몇몇의 성공신화를 만들고 나머지 모두는 희생돼야 한다. 개방정책 앞에 지속적인 벼농사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진작에 팔았어야 했는데…, 요놈에 징그러운 벼농사”

5년전 쌀시장이 개방된 후 지난해부턴가 일반 소비층이 가격이 싼 수입쌀을 선호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연일이다. 5ha규모의 대규모 벼농사를 짓고 있는 정부미씨는 몇 달전부터 낮술로 허송세월이다. 도무지 생산비를 건질 수 없는 논농사에 질려버렸기 때문.

6년전 정부의 농기업 육성정책에 따라 정씨는 1ha의 자가 논에 인근 4ha를 임대 받아 규모있게 농사를 벌여왔다. 정부가 주관하는 품질고급화 교육도 꾸준히 들었고, 농협브랜드사업에 동참하면서 갖가지 세제혜택, 융자혜택 등도 받았다.

정씨는 그러나 규모는 커졌는데, ‘벌이’가 신통치 않아 항상 고민이다. 매년 일정량을 사들이던 농협도 근래들어 수매 규모를 줄이고 있어 더욱 갈등이다. 농협 처지도 모르는 바 아니다.

소비가 줄고 재고량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수매 물량만 놓고 전전긍긍한다는 걸 정씨는 알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수입쌀이 점점 소비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씨에겐 벼농사 자체가 ‘폭탄’이다.   

당초 정부는 쌀시장이 개방돼도 관세가 높아 가격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국내 쌀산업은 크게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개방 후 몇 년은 그런대로 별 이상 없었다.

헌데 미국, 중국과 FTA가 체결되면서 쌀 관세율이 대폭 낮아졌다. 중국의 동북 3성과 미국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 등에서 밀려들어온 수입쌀은 가격부터 국내산의 절반값이다. 거기에다 품질 또한 국산과 똑같거나, 일부는 더욱 찰지고 맛 좋다. 수입산이란 표시만 없어도 포장지 상표만 보면 ‘갑돌이네쌀’ ‘먼데서오신정승쌀’ 등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다.

경기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소비자에게 애국심을 호소할 수도 없는 때다. 한마디로 정씨는 농사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도 걱정이지만, 넙죽넙죽 받아먹은 정부 돈은 뭐로 갚아야 할지 갑갑합니다.” 정씨의 소줏잔이 햇빛에 더욱 또렷해 보인다.

“정리하라고 도와줘서 고맙죠.”  
 
화훼수출육성단지 관리사무소 직원인 한우리씨는 3년전만 하더라도 한우를 키우는 축산농가였다. 30마리정도 사육규모였던 그 당시엔 한우전문조합의 조합원으로, 농장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우사업단이 출범하고, 소값이 하향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30여마리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었다. 시설자금과 종합자금을 상환하던 처지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나날이었다. 결국 농장부지를 담보로 역모기지제도를 이용해 자금을 얻어 빚을 갚고, 10여년간의 축산업을 마무리했다.

지금은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화훼단지 경비일을 보고 있다. 한씨는 그때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농가들이 그만 둔 때라 별로 서운하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지금 소를 키우는 농가들을 보면 너무 힘들어 보여요.” 그도 그럴것이 국내 소고기 시장은 각국의 제품들이 즐비한 ‘국제시장’으로 변해서, 웬만큼 특색있는 브랜드가 아니고서는 경쟁에서 밀리는 분위기다. 한우사육농가들은 그들대로 가격경쟁에서 밀리고, 생산단가도 못맞추는 ‘멍에’를 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한씨의 말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생산단가를 낮추고 품질을 고급화하기 위해 꾸렸던 한우사업단 운영이 국가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한우 고급브랜드로 언론에 자주 나오는 사람이나, 농기업으로 성공해서 직원 200여명을 거느리는 사장님이 됐다는 특별한 얘기, 외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작물 재배에 성공해서 대박 신화를 일궜다는 정보는 이제 식상하다.
“물론 있겠죠. 그런데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 아닙니까.”

한씨는 주위에서 ‘복받은 사람’으로 통한다. 농촌에 실업자가 넘쳐나는 터에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시장이나 가게 앞에 가보면 남자들이 득실합니다. 예전 농한기 때 할 일없이 놀던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와 다른 것은 하나같이 빚더미위에 있다는 사실이죠.”      

“상여나간 집 같어, 적막강산여!”

나이들어 걷기도 불편한 심심이 할머니는 이런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4차선 도로 한켠에 돗자리 펴고 앉아있다. 멀리서 보면 유럽풍의 전원주택이 균형있게 배치돼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당초 이 동네는 친환경 농산물 종합물류센터 부지로 계획돼 있던 곳이다. 한동안 검은색 자동차가 빈번하게 다녔고, 네모난 가방을 든 외국인들이 수시로 돌아보던, 부산했던 동네다. 부동산 간판을 단 가건물이 동네를 에워싸고 북새통을 이루던 게 3년전 일이다.

계획과는 달리 물류센터는 들어서지 않고, 도로 확장공사와 주택건립 공사가 계속됐다. “동네 사람들 전부 이사갔지. 정부가 나서서 개발한다고 하고, 땅값도 제대로 쳐준다고 하는데 어영부영 다 갔지.”
심 할머니도 밭농사를 짓던 시절이 있었다. 옥수수를 거둬 도로옆에서 장사도 했었고, 콩이나 고구마는 상자로 묶어 자식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리 크지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갈만 했다.

얼마전 밭을 팔라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제는 모시고 살겠다는 자식의 뜻이 맞아 떨어져 밭이 처분됐다. 허나 도시살이 한 달만에 다시 내려온 시골. 빈집을 월세로 빌려 혼자 살고 있다.

나라에서 나오는 기초생활경로연금 이외에 생활비는 자식들이 보내주지만, 내손으로 농사지어 생활할 때와는 너무 차이가 크다.

심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은 외부사람들이 전부 매입해 묵혀두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몇몇 임대농들만 눈에 띌 뿐,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라거나 닭이 홰치는 소리는 이곳에 없다.
산새소리만 심 할머니의 가는귀를 맴돌 뿐이다. 임야나 농지에 대한 개발규제가 대부분 풀린 상황이라 땅 주인들은 언제든지 의도대로 이 곳을 꾸밀 수 있다.

심 할머니가 앉아 있는 이 곳이 어쩌면 대규모 위락시설 정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외부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부가가치 없는 농사를 다시 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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