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새싹들의 달이다. 나무들마다 어느새 새싹이 올라와서는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고 있다. 왜 5월이 어린이의 달이고, 그들을 가리켜 왜 새싹이라 표현했는지 실감한다.

인간의 삶 역시 자연 속의 일부이기에 예부터 우리는 자연현상을 빌러 삶의 모습을 표현해 왔다. 자연과 비교하고 비유의 대상을 찾아내는 것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고 살찌우는 행위였다. 자연에서 느끼고, 느낀 것을 표현해야 했기에 시가 등장했고 산문이 생긴 게 아니겠는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새싹이라 비유한 것에서 새삼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엿보게 된다. 사람이 자연과 항상 접하며 땅을 일구지 않았다면 그처럼 파릇파릇한 표현들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옹호하려고 하는 생명존중의 절대가치는 결국 자연과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산업화와 정보화의 급속한 전개 속에서 이와 같은 친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김종철 선생이 이야기 한 바, 미국의 어느 대학교수에게 누군가가 건포도 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그 교수가 진지한 어조로 ‘건포도 나무는 어떻게 생긴 거요?’라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니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른바 엘리트층의 자연에 대한 무지는 거의 막장까지 온 것 같다.

각설하고 어쨌든, 새싹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포도나무도 예외가 아닌지라 영동의 포도농가들도 지금 순정리가 한창이다. 포도 새순은 올 초에 전지한 가지 언저리에서 보통 서너 개씩 나오는데, 농부들은 일반적으로 그 순들 중에서 건강해 보이고 햇볕을 잘 받는 한 두 개씩만 남기고는 모두 손으로 끊어내 버린다. 그리고는 그 새순들에서 한 두 개씩의 결실을 맺게끔 포도나무를 키워 나간다.

본격적으로 포도농사를 지은 것이 작년이 첫해이고 보면, 올해가 제대로 순솎기를 하는 두 번째 해인 셈이다. 지난해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순을 솎아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솔직히 부담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일단, 무엇을 솎아야 할지가 참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솎을 필요에 대해 확신이 없으니 하나하나 솎아야 할 때마다 어떤 걸 정리해야 할지 쉽게 행동으로 못 옮기고 고민하게 된다. 농사경험이 일천한 탓도 있겠으나 내가 이것을 선택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남들은 하루에 다 해치울 양을 나는 사흘째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고 방황하는 중이다. 우유부단한 자는 속도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결국 핵심은 왜 굳이 새순을 솎아야 하는지 내가 그걸 아직 잘 모른다는 데 있다. 새롭게 세상 여행에 나선 새순들의 반 가까이를 인간의 작의적인 판단으로 몸통에서 끊어낸다는 게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후 눈이 터서 새순으로 나왔다면 어떤 것이든 결실을 맺을 때까지 저마다 살아있을 자격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곤 한다. 이런 것 때문에 부처가 생존해 있을 당시 승가의 계율에서는 농사의 일체의 행위가 수많은 미물들을 불가피하게 죽일 수밖에 없다고 농사를 금기시하지 않았을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불살생계를 반드시 지켜야 할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오죽했겠으랴.

새순을 정리하면서 또 한편 불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쟁력이 없는 인간, 경쟁력이 없는 농가, 경쟁력이 없는 농업…. 솔직히 이 모두가 어쩌면 솎아내기의 대상이 된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닌가. 새싹과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의 일부는 이미 솎아내기의 멍에를 짊어졌을 지도 모른다. 새싹들이 정리되는 시간, 아이들 역시 잔인한 현실논리 속에서 정리가 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세상사의 원리라 당연지어 말하지는 말자. 자연은 그래도 어느 누구에게든 생명의 본능이 작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오지 않았는가. 그것을 져버리고 자연의 원리와 스스로 담을 쌓은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아, 새순을 솎지 않고 농사지을 방법은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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