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 A마을의 병수 형님과 오래간만에 안부를 나누었다. 그 형님은 내가 이곳 영동에 정착하기 전 농사의지와 가능성 등을 미리 점검하기 위해 1년 동안 그곳에서 사는 동안 가장 가까웠던 분이다.

형님과 통화하면서 인호 형의 근황을 물었다. 작년 여름에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인호 형은 봄에 마을을 떠나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팔순을 넘기신 노모를 홀로 남겨놓고, 땅을 팔아 생긴 급전을 챙겨 황황히 집을 떠난 형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병수 형님은 인호 형이 얼마 전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잘 짓고 있다고 전했다.

“갸 이제 마음잡은 것 같여. 술도 끊었고, 모친도 아주 살뜰하게 챙겨.”
인호 형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던 병수 형님의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대전 역전 시장통에서 노숙자 꼴로 술에 취해 나앉아 있더라는 소문하며 이런저런 안 좋은 소문이 그동안 마을에 나돌았는데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인호 형이 마을을 나가 방황하게 된 것은 여자 때문이었다. 40대 중반의 형에게 어느 날 선이 들어왔다. 대전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한다는 여자였는데,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몸매나 얼굴이 보통 이상이었다. 형은 노총각 신세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나 싶었다. 참으로 순진했다.

당연히 인호 형은 그 여자에게 처음 만남부터 깊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 여자 역시 형이 남자답다며 사귀는 데 주저 없이 동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이 진도가 나갈수록 형의 씀씀이가 커져갔다. 좋은 옷에 좋은 신발을 찾았고, 농사꾼답지 않게 항상 정돈된 머리에, 몸에는 향수를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문제는 여자가 겉과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호 형이 결혼하자고 제의하자 선뜻 수락하면서, 시골까지 왕래하려면 꼭 필요하다며 자동차를 요구했다. 형은 자신에게도 없는 자동차를 비록 중고라 해도 꽤나 부담스런 돈을 치러 선물해 주었고, 이후에도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말에 번번이 수백만원의 돈을 여자에게 내주었다. 만남의 횟수가 거듭되는 만큼 우시장에 내다파는 소도 늘어갔다.

그들의 만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여자는 소식이 끊어졌다. 여자의 집을 찾아갔지만 이미 방을 뺀 상태였으며, 한 다리 건너 선을 주선해 준 사람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여자에게 들어간 1천만 원이 넘는 큰돈도 문제였지만 더욱 심각했던 것은 형의 상실감과 패배의식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여자에 대한 진한 애정,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 뜨거운 감정이 무참하게 짓밟혔으니 형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주위 사람들이 ‘자네는 사기 당한 거네. 깔끔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게. 제발 노모를 생각해서라도’라며 아무리 간절하게 설득을 해도 본인은 배신당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며 조만간 다시 연락이 올 거라고 그는 한사코 우겼다.

마을 사람들은 인호 형이 나쁜 여자를 만나 화를 입었다고, 못된 여자한테 당했다고 그를 안타까이 여겼다. 벼룩의 간을 빼어 먹어도 유분수지 근근이 살아가는 농사꾼을 등쳐먹었다고 여자를 씹고 또 씹었다. 힘 좋고 일 잘하는 것으로는 마을에서 첫째가던 한 성실한 농사꾼을 버려놓은 그 인간을 우리는 저주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뜻대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인호 형은 매일같이 아침부터 술에 절어 살았으며, 술기운에 젖으면 나나 다른 형님들을 찾아 울며불며 처지를 한탄했다. 형으로서는 하루하루가 지탱하기 힘든 참담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자를 찾는다는 핑계로 마을을 뜨고 만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인호 형은 아마도 지금 절치부심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헛것이 보이고 과거의 일들이 생각날수록 형은 더욱 열심히 일에 파묻히려 할 것이다.

생과 사 사이에 별의별 험한 일을 다 겪는 게 인간의 삶이라지만 형의 입장에서는 아주 고약한 시련의 시기를 보낸 셈이다. 그때의 상처와 아픔이 아물고 온전히 치유가 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형이 이제는 방황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전의 그 멋진 농사꾼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더불어 ‘나쁜 여자’가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깨끗한 농촌이 만들어지길 또한 기대한다.



김 철 (ychul20@gmail.com)
1968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다 자연과의 공생과 노동을 통한 삶의 균형을 찾고자 2007년 충북 영동으로 귀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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