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모종이 튼튼하게 올라와 적이 안심됩니다. 모두 토종인데 대략 열대여섯 가지 정도 되는 씨앗들이 길게 묵은 것은 3년도 더 되었거든요. 아내가 꽁꽁 묶어 냉동실에 넣어두기는 했어도 미심쩍었습니다. 작은 포트에 한 알씩 넣어 터널에 늘어놓고 물을 푹 주고 기다리기를 열흘, 싹틀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터널 안 기온을 25도로 맞췄어야 해.”아내가 먼저 조바심을 냈습니다.“몇 개 파 볼까?”여차하면 새로 넣을 심산으로 제가 이렇게 말했더니 아내가“사람이, 좀 진득해라.”먼저 기온 낮은 것 아니냐고 안절부절못해놓고 이럽니다. 아예 한마디 더 합니다.

“쳐다보면, 네 하고 씨앗이 움트나? 완두 모종이나 옮겨 심어요.”연두색이 앙증맞은 완두가 괜히 밉상으로 보입니다. “어머 나도 그래, 호호.”

애꿎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완두는 제가 도맡아 심었습니다. 새기기가 겁날 정도로 자잘한 일이 많아 아내는 모로 뛰고 세로로 뛰며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날에는 아내와 멀찌감치 떨어지는 게 상책입니다. 도우면 돕는 대로 걸리적거린다고 투덜대고, 그저 보고 있으면 무심하다고 퉁을 놓기 일쑤거든요.

“무거운 것 옮길 일 있으면, 심다가도 내려올 테니까 불러. 알았지?”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농사일이 손대면 죄다 일이 되고, 놔두면 짐이 되는 판이라 늘 뒤가 묵직합니다. 도시 살 때 간결하고 깔끔하게 생활하던 아내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습니다.

제 눈에는 어수선한 잡동사니로 보이는 데 아내는 거기에 순번을 매겨 놓고 차례로 처리한다고 우기는 게 아내 옛 모습의 흔적일 뿐입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아내의 이러한 변화는 타고난 성품에 비추어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본받아야 할 적응력입니다.

 완두 심는 내내 세찬 바람이 불었습니다. 돌풍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습니다. 심으면서도 은근히 고라니 걱정이 앞섭니다. 꾸물대다가 방지망 수선을 여태 안 했거든요. 올해 들어 밭 안으로 들어온 흔적이 없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만,

“먹을 게 있어 봐. 득달같이 뚫고 들어오지.” 라는 아내 말이 옳습니다. 단 하루면 싹을 모조리 뜯거나 뿌리째 뽑아놓고 말 것입니다. 심는 대로 둘러보기로 합니다.

다년간 손보고 있어 ‘개구멍’ 만 잘 살펴보면 되니까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 심고 나니까 은근히 뿌듯합니다. 모종판 네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군요. 아내에 견주어 손이 느려 늘 타박을 들었는데 제법 손을 재게 놀릴 줄 알게 되었군요. 내친김에 지난해 양파 덮으려고 가져다 놓은 부직포를, 세찬 바람을 무릅쓰고 덮었습니다.

“아 참, 완두밭에 고라니 들어오면 어쩌지?” 그럴 줄 알고 부직포로 덮어두었다고 하니까 아내가 칭찬 대신 타박을 합니다. 한가할 때에는 뭐하고 안 해도 될 일을 한다는 거죠. 간간이 저온현상이 있을 텐데 완두 성장에도 좋겠다고 우겼더니 아내는 쥐 등쌀에 더 넣은 완두라 그 많은 거 거둘 일이 걱정이라는군요. 맞습니다. 지난해에도 일에 치여 완두 걷는 게 말하자면 고달픈 잔업이었습니다.

 오후에 날이 흐리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모종판 있는 비닐하우스로 가지고 합니다. 싹튼 고추가 겨우 본잎이 나올까 말까 하는데 더 큰 모종판으로 이식하겠다고 합니다. 상토에 아직 양분도 많이 남아 아까우니까 나중에 하자고 했더니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와, 우리 남편 언제부터 알뜰해지셨나?” 하루가 다르게 일이 늘어나니까 지금 하는 게 낫다고 아내는 서둡니다.

거치적거리니까 저더러는 옮겨 심을 대파를 뽑아 오라는군요. 아는 육묘장 돕느라 여러 해 모종 다뤄본 솜씨라 모종하거나 옮겨 심고, 모종 삽목까지 거침없는 아내입니다. 쪼그리고 앉아 모종 심느라 하체가 뻐근해져서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호미질하자 굵고 투실투실한 파 알뿌리와 함께 새하얀 뿌리가 뭉텅 떨어져 나옵니다. 문득 아내의 흰 머리칼이 떠오릅니다. 늦지 않은 후에 간결하고 깔끔한 생활을 아내에게 돌려줘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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