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내내 궂은 날이 많더니 한겨울에도 맑은 날이 드물군요. 엊그제는 밤새 눈이 왔는데, 당장 한파가 닥친다는 소식이어서 아내와 또 한바탕 눈을 치웠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한 일주일은 차가 드나들지 못할 게 빤합니다. 대충 하라고, 그러다가 탈난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하며 아내는 넉가래를 연신 밀어젖히더군요.

습설이야, 습설.” 아내는 쉬는 짬마다 중얼거렸습니다.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덩달아 저도 무리했는지 며칠이 지나도록 팔과 어깨가 결립니다. “눈은 그친 다음에 쓸면 안 돼.” 아내가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합니다. 떡이 된 눈을 치우는 일은 정말 고약합니다.

 

그거 봐. 차를 끌고 올라왔더라면 어쩔 뻔했어?” 꼼짝없이 차가 갇혔겠습니다. 아내의 의견대로 차를 마을 어귀에 대놓고 온 게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매사에 찬반이 엇갈리는 부부이다 보니까 저는 차를 몰고 올라가자는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턱짓으로 공치사 하는 게 보기 싫어 저는 어깃장을 놓습니다.

개 사료 한 포대나 메고 오느라 고생한 건 누군데!” “에고, 그럼 개들 굶겨?!” 덜어 왔으면 괜한 고생 안 했겠다고 재우쳐 우겼더니 참으로 아름다운 답이 돌아옵니다. “겨우내 남아도는 힘 어디 쓸 건데?”

 

눈 쓸고 며칠 지나서도 팔이 결리고 엉덩이까지 욱신거립니다. “이게 다 개밥 메고 올라가느라 아픈 거야.” 덤바우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한마디 했습니다. 눈 치웠다 해도 아무래도 볕들지 않는 몇 군데 길은 얼어붙었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아내는 대꾸 없이 열심히 전화기만 노려봅니다. 바쁠 때는 뜸하다가 한가하기만 하면 싸구려 쇼핑 하느라 여념이 없는 아내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화기가 부부지간의 대화를 자주 잡아먹습니다.

아주 쇼핑 중독이야.” 마구 사는 게 뭐 있냐며 아내가 펄쩍 뜁니다. 사실입니다. 따지고 또 따지다가 결국 포기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게 말이야. 도박중독도 그렇거든. 뭐 판돈이 커서 중독이 아니라 쉬지 않고 하니까 중독이거든.” “도박하고 같아?!” 아내가 성질을 내는 사이 버스가 도착합니다.

버스에 아내와 함께 나란히 앉으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도박 어쩌고 하며 계속 침 튀겨가며 투덜대더라도 전화기에 빨려 들어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버스 승객은 우리 부부까지 합쳐 네댓 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올해 하우스 농사 쉽지 않겠다.” 아내가 차창 밖의 딸기 비닐하우스를 보며 걱정합니다. 뉴스를 보니까 겨울 궂은날이 잦아 병도 심하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양파 부직포로 덮을 걸.” 단순히 유행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 사는 지역의 양파 밭은 몇 해 전부터 겨울이면 어김없이 새하얀 부직포가 덮입니다. 덮고 벗기는 시기가 알맞지 않으면 웃자라고 꽃대도 더 올라올 수 있다고 했더니 아내가 혀를 찹니다.

우리 양파, 웃자랄 걱정이셔요?” 비꼬거나 말거나 이렇게 아내와 대화를 나누니까 무조건 좋습니다. 제가 실실 웃자 아내가 눈을 흘깁니다. “올 겨울은 따뜻할 줄 알았지.” 제가 간단히 변명을 하자 아내는 단박에 명토 박습니다. “그래서 눈 올 것도 모르고 차 몰고 올라가자 그랬겠지요. 호호.”

버스가 정차하고 할머니 한분이 오릅니다. 계단 오르기가 버거웠는지 한숨처럼 욕지기를 하십니다. 버스기사가 껄껄 웃음으로 화답합니다. 서로 아는 사이 같습니다.

늙으면 죽어야지.” “아이고, 십 년 전에도 그러셔놓고는.” 이번에는 할머니가 쇳소리를 내며 웃습니다. 아내가 할머니 욕지기가 질펀하다고 제 귀밑에 대고 속삭입니다.

그 소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몸이 내는 소리야. 나도 이젠 가끔 나와.” 아내는 면전에서 욕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댑니다. 그럴 일이야 있겠습니까? 마을 들머리에서 앞서가는 아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나이 더 들면 아내도 저 할머니처럼 이야기꽃 피우는 아름다운 수다쟁이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봐. 손 빼고 걸어. 미끄러지면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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