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우리 마을은 한산합니다. 어쩌다가 버스로 들어가도 마을 입구에서 저 끝 덤바우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 하고 지나치게 됩니다. 기척 없이 마을을 떠나 양노원이나 도시 사는 자식들의 품으로 가는 어르신들도 많아 더 그렇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툴툴대는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돌던 어르신이 보이지 않는군요. 길에서 만나 어디 가시냐고 물으면 돌아오던 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어어, 심심해서. 아까운 기름이나 때고 다녀, 허허.” 일찍이 허리가 상해 농사는 작파하고 오토바이를 애마처럼 부리며 하루 한두 번 순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엊그제는 운이 좋아 마을 어귀 돌아드는 길에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좁은 농로에 차를 대놓고 길에 잇단 언덕에서 나를 베고 있었습니다. 우리 차를 발견하자 부리나케 차에 오르는 걸 보던 아내는 “에이, 참. 천천히 하지.” 이러며 우리 차를 후진하여 비킬 자리를 찾아 정차합니다.

다가온 차의 주인은 시세가 어떻든 꿋꿋이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입니다. 활짝 웃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깊이 합니다. ‘반갑소, 그런데 나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뭐, 이런 뜻입니다.

서운하군요. 해거름이라 나무 실어다 놓고 소 먹이러 가야 해서 그런가봅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축사라 어둡기 전에 하자면 바쁘기도 하겠습니다.

“게다가 날도 춥잖아.” 저렇게 벤 나무는 쟁여 두었다가 화목 보일러에 넣겠습니다. 벤 나무들 차에 싣고 내리기도 보통 일은 아닙니다.

어느 해인가 이제는 돌아가신 형님뻘 되는 농민이 버섯농사 하겠다고 덤바우 뒷산에서 벌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겁도 없이 나무토막 싣는 것 거들다가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 기름이나 전기 보일러였으면 난방비 감당이 되겠어?” 딴은 그렇습니다.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 까막눈이지만, 기름 값 불안한 건 피부로 느낍니다. 등유가격이 너무 높아져서 가온하는 비닐하우스 농민들 한숨이 깊겠습니다.

우리 부부와 같은 해에 이곳에 정착해 육묘장 하는 친구도 혹한기 육묘는 접었다고 합니다. 말이 나와 하는 말입니다만, 그 육묘장에서 나오는 모종 물량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을 보면 쪼그라드는 농산물 생산량도 걱정스럽습니다.

“날도 추운데 난로부터 지피시지?” 아내는 하나마나한 걱정은 거두라고 합니다. 걱정제조기나 다름없는 아내한테 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이거 가져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일 할 때 쓰자.”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날 버려진 소형 등유난로를 발견한 아내가 탐을 냈던 난로가 지금은 농막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비닐하우스에서 썼는데 성능이 대단히 좋아 방으로 들인 것입니다.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지?” 저도 감탄했습니다. 처남들이 두어 난로를 더 가져다주었지만, 영 신통치 않았으니 더욱 돋보였습니다. 겉은 벗겨지고 녹까지 군데군데 슬었는데도 냄새 없고 화력도 그만이니 신통할 밖에요.


 금세 연소통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방안 공기가 데워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화목보일러에 등 지지면 좋겠다.” “거, 할머니 같은 소리 하지 마.” 농막 바닥에는 전기 필름을 깔아두었어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등지질 정도로 쓰다가는 아마도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 것입니다.

아내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편지봉투를 꺼내 열심히 주소를 적고 있습니다. 다 쓰고 나자 여닫이 상자를 꺼내다가 열고 씨앗 담긴 자그마한 지퍼 백 여럿을 꺼내 방바닥에 나누어 놓는군요. 그러는 모습이 얌전합니다.

겨울 이맘때쯤이면 아내는 씨앗 주고받느라 바쁩니다. 그게 다 저 하얀 편지봉투로 이루어집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퍼지듯 수많은 토종 씨앗이 저리도 하얗게 방방곡곡을 날아다닙니다.

“멀뚱거리지 말고 뭐라도 하지?” 문득 아내가 새된 소리를 합니다. “저 난로 좀 닮아 봐. 커피라도 끓이던가!” “그냥 커피 한잔 주세요, 하지!” 살다 살다 난로 닮으라는 말까지 듣습니다만 머쓱한 자세로 커피를 끓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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