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은 다가올 365, 새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얼마 전 그날이 지났으니 오늘은 벌써 며칠을 까먹은 날인 셈인데 아내가 열심히 새 달력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달, 저 날짜에 적혀있는 농사력을 읽으며 혼잣말을 합니다. 옆에서 보기에 지루해서 그만 보라고 했더니 도리어 씨앗 넣어둔 통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아내는 차곡차곡 재어 두었던 씨앗 뭉치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금세 농막 방바닥이 씨앗으로 뒤덮입니다. “에고, 여기 있었네.” 아내가 찾아든 씨앗은 갓끈동부 콩입니다. 귀한 것인데 없어진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더니 씨앗 통을 다시 추스릅니다.

나중에 또 까먹고 찾을라.”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어디 따로 놔두던지!” 재우쳐 말했더니 제가 들고 온 통에 들어 있는 씨앗들을 줄줄 외면서 그럴 일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아내는 씨앗 치운 자리에 아예 배를 깔고 누워 달력 보기 삼매경에 빠져들었습니다. 늦은 아침 대충 먹고 일 나가자고 해놓고 저러고 있으니 답답해서 또 한마디 합니다.

일 안 해?” “먼저 가.” 안될 말씀입니다. 무슨 재미로 이 황량한 겨울에 홀로 일을 하겠습니까? “하우스용 파이프 옮기면 되겠네.” 그 일은 순서상 아직 아니라고 했더니 그깟 일에 무슨 순서냐고 퉁을 놓는군요. 한바탕 하려다가 꾹 참고 밥이나 먹고 더 보라고 했더니 다 봤다며 달력을 탁 놓더니 묻습니다.

이거 어디에다가 걸까?” 그러는 아내가 올 한 해 농사 다 지은 사람 같은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스스로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빚쟁이처럼 제가 숨 쉴 틈도 안 주고 올 농사 청구서를 내밀겠죠. 진작 약속한 대로라면 제가 토를 달 일이 없습니다만 믿기지 않습니다.

 

맘대로 계획 바꾸면 안 돼.” 행여나 달력 독서 하다가 마음 바뀌었을까 봐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올해 호박밭은 새로 다듬은 밭 언저리에다가 하겠다고 우깁니다. 지난해 제가 공들여 여러 구덩이 파고 거름까지 두둑이 넣었던 자리는 풀밭이 되고 만 전력이 있습니다.

파 보나 마나 아내가 지목한 자리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묻혀 있을 게 빤합니다. “언제고 캐내야 하잖아, 안 그래?” 어쩌면 이리도 얄밉게 대답을 하는지 손등에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제가 한 번 더 버티는 말을 했다가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럴 것 또한 빤합니다.

 

다듬어 울타리콩 심을 예정인 몇 해 묵혔던 밭에는 아까시나무가 말 그대로 쑥대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풀이든 잡목이든 어설피 건드렸다가는 더 번성한다고 하시던 마을 어르신 말씀이 딱 맞는군요.

지지난해 큰 처남이 알뜰하게 베어주었는데 뒤처리를 한 해 미뤘더니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부득부득 충전 전기톱은 쓰지 않겠다는 아내여서 작은 톱 톱날을 새것으로 바꾸어 써보니 수월합니다.

가는 것은 아내가, 굵다 싶은 것은 제가 베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지난해가 되고 만 일주일 전쯤 제가 일부를 베어놓아선지 금세 마쳤습니다. 훤합니다. 이런 밭을 몇 해 묵힌 게 후회됩니다.

이제 밭에 기름기가 좀 돌겠지?” 워낙 이 밭은 우리 부부가 덤바우에 들어오기 전에 산사태로 생땅이 덮친 곳이었습니다. 묵히기 직전에 심었던 야콘이 거름 발을 받지 못해 손가락만 했던 게 기억납니다. 앞으로 몇 번 콩을 재배하면 흙이 더 좋아지겠습니다.

농막에 돌아오자 아내가 이번에는 지난해 달력을 꺼내놓습니다. 뭘 보려고 그러냐고 했더니 지난해 이맘때는 뭘 했는지 궁금하답니다. 저도 문득 궁금합니다. 아내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지지난해 오늘이 코로나 걸렸던 날이라는군요. 머리 맞대고 농막에 틀어박혀 지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무작정 함께 지냈는데도 다행히 저는 무사했습니다. “새롭지? 그러니까 내가 적어둔 것들 가끔 꼼꼼히 읽어요.” 이미 겪은 것들을 얼마나 잊으며 한 해를 보냈을까 생각하니 문득 긴장됩니다. 저도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둔 게 책 한 권은 족히 될 겁니다. 어쩌면 오늘은 지나간 모든 오늘을 기념하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내 농사일지도 읽어봐.” “댁 글은 재미없어.” 맥빠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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