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은 한해입니다. 덤바우를 통과해 내려가는 개울이 둘 있는데, 밭 가운데를 지나는 개울은 웬만한 비가 오더라도 물이 흐르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러나 태풍 등으로 인해 큰비가 오면 사정이 다릅니다.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그 물에 한쪽 밭이 모두 침수된 적이 몇 번 있을 정도입니다. 다행히 몇 해 전 배수로 정비가 이루어져 침수 걱정은 덜었습니다. 올해는 이 개울이 바싹 마른 날이 오히려 드물군요.


“발원지에서 물길 잡으면 이젠 용수로도 쓰겠네.”아내가 웃으며 말합니다. 저도 따라 웃습니다. 옛적에 이 개울이 마른다는 걸 모르고 발원지까지 가서 물길을 잡아 이백여 미터쯤 호스를 댄 적이 있습니다. 헛일이었죠. 지난해부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흐르는 날이 더 많아진 것이죠.

“맞아. 잦은 비로 물길이 새로 열린 건지도 모르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잖아.” “거의 두 번 변했겠네.” 이러며 아내가 눈을 흘깁니다. 그사이 저는 변한 것 하나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덤바우에서 농사짓기 시작하고 첫 3년은 내내 두 개울물 모두 풍성했습니다. 물 걱정할 일이 없었죠. 그저 호스를 대놓고 철철 나오는 물을 받아 쓰면 되었습니다. 가물어도 걱정이 없었죠. 그 후로는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뭄이 심했고, 농업용수가 심각한 걱정거리로 등장했습니다. 관정개발은 우리 부부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기에 대형 물통 몇 개를 장만했습니다.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가뭄을 잘 넘겨왔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앞으로의 걱정거리는 잦은 비와 습기가 될 것 같습니다. 두어 밭은 배수로 부실로 올여름에 물이 찼습니다. 워낙 계단식 밭들이어서 배수로가 많은 편입니다. 이걸 모두 삽질로 정비해야 할 모양입니다. 당장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소형 굴삭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좋지. 내가 운전할게.”콩과 팥을 가려내던 아내가 이러며 깔깔 웃습니다. 오래전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업교육을 받으며 아내는 농업용 굴삭기 운전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잘 할 겁니다.

“아냐, 관리기를 다루는 거 보면 댁이 더 잘 할걸?” 언감생심 굴삭기가 생길 리 없으니 아내가 마구 덕담하는군요.“아냐, 진짜야. 덤바우에서는 제일 잘 해, 호호.”웃던 아내가 갑자기 화들짝 놀랍니다. 가려내던 콩을 한 줌 팥 주머니에 넣고 말았군요.

“거봐! 사람한테 말 시켜서 그랬잖아.” 별일도 아닌데 저를 타박하는군요. 바쁜 탓에 모종판에서 무성해져 버린 것들을 뒤늦게 심어 겨우 씨를 건진 것들이라 아내에게는 무척 소중한 것들입니다. 검정팥에 검정울타리콩을 섞어버렸으니 난감하겠습니다. 저도 나서 솎아보려니까 구분이 안 됩니다.


“바보야, 콩은 윤기가 나고 팥은 탁하잖아.”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말을 듣고도 가려내지 못하겠군요. 대신 다 가려낸 아내에게 한마디 던집니다.

“올해 보니까 밭에 심은 것 중에 덩굴 막 뻗는 울타리콩이 섞여 있더라.”“모종 봐가면서 심어야지.” 아내가 매섭게 말합니다. 거기다가 대고 올해 콩은 죄다 아내가 심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군요. 아내가 무안할까 봐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걸 기화로 아내는 저의 온갖 불성실을 죽 늘어놓을 게 빤하기 때문입니다. 괜스레 비겁해진 기분이 드는군요.


“다 했으면 대파나 옮겨 심자.” 분위기도 전환할 겸 일할 채비를 하는데 문득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채근하지 말고 앉아보라더니 산자락 밑 묵혀둔 밭을 울타리콩밭으로 만들자고 합니다. 몇 번 나누었던 얘기입니다. 그러자면 역시 묵혀둔 소형 하우스 파이프 백여 개를 옮겨야 합니다.

아내나 저나 울긋불긋 알록달록 색깔도 모양도 다양한 토종 콩을 왕창 거두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고라니 피해도 막아낼 재간이 생긴 터라 더 미룰 수 없겠군요.

“그러자. 근데, 비가 꽤 올 것 같으니까 맛있는 거라도 해 먹자.” 아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실행계획을 짜야 할 판에 놀 궁리만 한다는 것이죠. 어설피 말했다가는 아내의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 빤합니다.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더니 아내가 피식 웃습니다.“그래, 잡채 해 먹자.”반색하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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