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입니다. 잠시 한파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은 낮과 밤의 기온이 차분하게 내려가는 때맞춤일 뿐입니다. 환절기의 새삼스러움이 익숙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즘 기후가 워낙 별스러워서 느닷없이 겨울 한복판에 더위를 던져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때 그러더라도 요 며칠은 얌전하고 착실한 소녀 같은 겨울이어서 볕 바른 곳에 앉으면 온화합니다.

이 따뜻함에서 봄볕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낍니다. 추위를 살짝 밀어내는 양지의 따스함은 곁불 쬐기 같은 안도감을 줍니다.


 “고양이 하고 짝해서 조는 거지”그러고 보니 제 곁에서 고양이도 곁불을 쬐고 있었군요. 아내에게 함께 쬐자고 했더니 콧방귀만 뀌고는 부리나케 농막으로 들어갑니다.

언제 봐도 아내는 늘 바쁩니다. 제가 천성이 굼뜨고 말귀가 어두운 편이어서 다행입니다. 아내와 비슷했더라면 만날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소란했을 것입니다.

“그만 놀고 이거 좀 와서 거들어.” 한가한 해바라기 놀이를 끝내야겠군요. 심통이 나서 툭 쳤더니 고양이가 엥 소리를 한번 내고는 더 편한 자세로 돌아눕습니다.


새로 장만한 수납장을 들이고 자리 잡느라 농막 안이 어수선합니다. 수납장 놓을 빈자리 마련하자고 먼저 터 잡고 있던 이것저것을 치워내자니 그것들 자리도 새로 마련해야 합니다. 일이라는 게 늘 그렇습니다. 한참 정리하다 보니 수납장은 뒷전이 되고 맙니다. 아내는 한쪽에 밀어두었던 토종 씨앗 가려내느라 부산하고, 저는 엉뚱하게도 몇 안 되는 책 정돈하고 있는 식입니다.


“이러다가 점심을 저녁에 먹게 생겼네.” 아내가 안 되겠다며 비워둔 자리에 수납장을 놓고 속옷가지들을 나누어 서랍에 쓱쓱 넣고, 자리 잃은 것들을 한데 모아 제가 가져온 박스에 대충 담고는 일을 마칩니다. “배고파?” “아직.” 점심은 건너뛰기로 합니다.

커피라도 한잔 하자는 데도 아내는 부득부득 쪽파마저 심겠다며 호미 들고 밭으로 가버립니다. 해가 짧아져 벌써 땅거미가 지는 것 같습니다. 괭이와 삽을 챙겨들고 아내 뒤를 따르기로 합니다.


 아내는 쪽파를 심고 저는 대파 옮겨 심을 이랑을 만듭니다. 산그늘이 져 으슬으슬 합니다. 바삐 오느라 아내가 겉옷을 안 입었군요.


“조끼 가져다줄게.” “빨랑 가져와.” 갔다 오기가 싫어 제가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줍니다. 한 겹 벗자 오싹합니다. “열심히 괭이질 하면 안 춥잖아.” 아내가 호들갑 떨지 말라며 호호 웃는군요. 아내는 손을 재게 놀리며 구멍 파고 쪽파 묻기를 반복합니다.

반나절 일거리도 안 되는 걸 여러 번 합니다. 미뤄뒀던 콩 갈무리에다가 오가피 열매 따고 가지 자르고 쪼개느라 바빴던 탓입니다. “무슨 소리. 고춧가루 비비고 담느라 더 바빴지.”그렇습니다.


우리 부부의 고추는 토종인데 모두 4종류입니다. 종류대로 따로 수확하고 고춧가루 낼 때에도 따로 합니다. 이것을 비율대로 섞는 게 마지막 작업입니다.


“이게 덤바우 고추 맛이지.”맛이 각별하든 아니든 그 방식대로 매년 해왔습니다. 전체 수확량이 늘어나고 있어 번거롭고 고된 작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아내는 그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부부의 원칙이라면 원칙이고 고집이라면 고집입니다.

“2차 발송하려면 오늘 저녁에 다 비벼야 해.” 아내는 섞는 일을 늘 비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군침이 돕니다. “저녁에 계란찜 해서 그 위에다가 고춧가루 살살 뿌려 먹자.” “호호, 살살 뿌려야 돼?” “그럼, 살살, 살포시.”


 어느덧 이랑의 빈자리에 쪽파가 가득 찼습니다. 며칠 있으면 새파란 새싹이 뾰족하게 올라오겠습니다. 저도 대파를 위한 빈자리를 새롭게 지었습니다. 이제는 자리 잡은 수납장이 그렇듯 빈자리는 거저 비어 있지 않습니다. 빈곳은 비운 곳이고 그곳에는 무언가 가득 차 있던 자리입니다.

겨우내 대개는 비어 있을 우리 부부의 밭처럼 마음자리도 비워야겠습니다. 빈자리 만드느라, 채울 것 장만하느라 한바탕 소란이 일겠습니다.“가자.”일어서는 아내의 뒤로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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