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막 앞에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농막을 짓기 훨씬 전부터 있던 나무로 15년 전쯤에 처남들이 심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밭떼기 하나 정도에는 은행나무를 가득 심고 싶다고 하자 다들 눈이 동그래졌었습니다. 그런 걸 심어 뭐하자는 심산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거, 장관이잖아.”가족들 동그래졌던 눈들이 게슴츠레해지면서 저를 비웃었습니다. 기왕 시작한 농사 악착같이 돈 되는 농사 궁리해야 할 판에 관광 타령한다고 혀를 차더군요.


“거, 여남은 그루 사다가 밭 가마다 심으면 되겠네요.” 제가 겸연쩍어하자 큰 처남이 이렇게 수습했었습니다.


 그런 사연을 안고 자라난 은행나무가 이제는 제법 커서 여름에는 농막 마당에 그늘도 드리워주고 해서 여름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은행나무 뒤편에 농막까지 들어앉았으니 제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창 너머로 보니까 아직은 단풍이 다 들지 않아 붉고 노란 색이 어울려 더욱 보기 좋군요. 나무가 하는 겨울 채비의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머잖아 자신의 발목까지 소복이 노란 이파리를 덮게 되겠습니다.


“심어 주면 뭐해? 저기 위에는 어제 심은 것들처럼 죄다 난쟁이더라.” 그렇습니다. 그쪽의 서너 그루는 영양실조에다가 주변 잡목들이 너무 성해 햇볕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가을 가기 전에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마운 줄을 몰라요.” “거, 심은 사람들이 알아서 관리해야지. 안 그래?” 제 어깃장에 마늘 심던 아내가 호미를 든 채로 냅다 달려올 기세입니다.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껄껄 웃다가 문득 허전합니다. 처남들과 어울려 세상만사 다 잊고 덤바우 떠나가라 노래 부르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마저 심어.” 이렇게 외마디를 남기고 아내가 마늘밭을 떠납니다. 안 그런 철이 있겠습니까마는 요즘이 아내에게는 대목입니다. 며칠 불려두었던 고들빼기 건져 양념에 치대어야 하고, 알맞게 자라 뽑아놓은 총각무 다듬어 김치 담가야 합니다. 제가 극구 말려도 조만간 무말랭이도 만드느라 부산스러울 것입니다.

올해는 고목이 되어선지 감이 흉년이라 곶감은 깎지 못하겠군요. 그건 다행인데 감 좋아하는 아내인데 좀 아쉽기는 합니다.

가지치기를 세게 하면 원기가 회복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금세 사라지지 못하고 밭 어귀에서 꾸물대다가 저를 부릅니다.

피어난 새빨간 구절초를 보여주는군요. 저는 지나치며 언제 붉은 국화 심었나 했더니 구절초였군요. 그 선연함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화병에 꽂았다가 꽃 지면 꺾꽂이해야지.” 내년 가을에는 농막 앞마당에서 저 붉은빛을 감상할 수 있겠습니다.“그거 귀에 꽂으면 댁이 화병이 되는 거야.”“흥, 왜 입에 물고 뛰어가라지?”


 아내가 없는 밭에서 마늘 심으려니 공복감처럼 심심함이 밀려듭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공허해 보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심은 양파를 살펴보니 자리는 잡았는데 생기는 덜 합니다. 모종을 낸 양파는 활착이 더딥니다.

갑자기 추워지면 상하는 것이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날도 건조하니까 물을 한 번 더 주기로 합니다. 밭 곁에 2톤들이 물통이 있어 여간 편한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우리 마을 농사에 다시 양파 붐이 일었습니다. 너도나도 양파를 대량으로 심고 있더군요. 다른 곳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쉬어가던 겨울 농사가 살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마늘 심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아내가 나타납니다. “고작 그거 심다가 날 새겠네.”제가 개울부터 오는 호스를 세 갈래로 나누어 물통으로도 들어가는‘관개 시스템’만드느라 바빴다고 하자 혀를 찹니다.

“그게 급해? 그리고 그런 게 시스템이야? 누가 들으면 대단한 엔지니어인지 알겠네.”

“말 좀 예쁘게 하지?” “나 안 예뻐!” 이제야 심심함이 좀 사그라듭니다. 아내는 고랑에 털썩 앉아 마늘을 한 줌 쥐고 심기에 나섭니다. 그 웅크린 가슴으로 햇볕이 쏟아지니까 마늘이 하얗게 빛납니다. 저렇게 아내의 손끝에서 가을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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