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비 온 듯 이슬이 내렸습니다. 요사이 새벽 풍경이 그렇습니다. 흠뻑 젖은 풀이 이슬 무게에 축 늘어져 버거워합니다.

덤바우 밭을 둘로 나누는 나지막한 동산 자락 바위틈 철쭉이 꽃 몇 잎을 피웠는데, 역시 찬 이슬에 봉오리가 뭉개지다시피 했습니다. 봄과 가을은 엇비슷합니다만, 가는 방향이 반대라서 느낌이 다릅니다. 봄꽃은 무어라 이름할 필요조차 없는 풍성한 약속인데 가을꽃은 애먼 미련처럼 보입니다.

아쉬움이나 회한일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난쟁이 명아주가 꽃대를 올린 채 서리 맞은 것을 보고 아내는 의연하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는 사뭇 다른 감성입니다. 가끔 과해서 질정 없어 보이는 아내의 바지런함이 그런 의연함을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말은 좋게 할 수 없어서 그때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미욱한 거지.”


“내가 미련 맞는다고?!”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되돌려 주었으니 발끈할 수밖에요.‘추상’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아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민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병충해가 아니라 서리입니다. 소리 없이 어느 날 닥치면 넓적한 호박잎이 폭삭 주저앉는 것을 신호로 늦어진 갈무리가 있다면 여지없이 망가지고 맙니다. 


“그래도 가을꽃이 더 예쁘기는 해.” 제가 이렇게 능글맞은 토를 달자 아내는 약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미욱하다’ 는 어리석고 둔하고 미련한 걸 이릅니다만,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자신을 낮추어 평가하는 겸양의 표현입니다. 다른 이를 헐뜯자고 만든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서두름 없이 찬찬히 진득하게 좌고우면하지 않고 나아가는 성실한 자세를 상대에게 낮게 표현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그러는 것처럼 가까운 사람의 성실을 추어줄 때 써도 좋겠습니다. “사람이 왜 그리 미욱해?”융통성 좋게 때로는 곁눈질도 하자는 권유의 말도 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미욱해서 묻는데, 배추 포기 묶을까 말까?”마을 배추는 어느 사이 다 묶여 있더군요. 마을 할머니들은 참으로 ‘미욱’ 합니다. 거의 이십 년 보아왔는데 어느 날, 어느 시가 되면 마을 배추 모두가 하나같이 치마단 묶듯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묶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의견이어서 아내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럽니다.

“영하로 떨어질 즈음 묶자.” 마을 할머니들이 조금 이르게 묶는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된서리와 영하의 날씨는 늘 불현듯 오기 때문이죠. “응, 엄마. 올해는 배추 걱정하지 마.” 어제저녁 아내가 장모님과 이렇게 통화하더군요. 올 김장용 배추 농사는 잘 되어 아내가 기분이 좋습니다.

“뭐라고 하셔?” “응, 배추 걱정한 적 없대.”얄미운 장모님입니다. “올해도 엄마집에서 담그자고 하시네.” 지난해 김치 치대시면서 하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애걔, 애걔.” 배추 이파리들이 실속 없어 보여 그러신 거죠. 제가 곁에서 보기에는 그래도 씹을수록 맛좋고, 오래 두어도 쉬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장모님이 이러셨습니다. “누구네 김치는 안 그럴까요?” 아내는 정모님을 쏙 빼닮은 게 분명합니다.


 아내가 제가 지어놓은 마늘밭을 검사합니다. 제가 봐도 고르게 잘 만들었습니다. “어, 마늘 씨 모자라겠네. 더 구해야겠다.” 마늘을 토종으로 대여섯 종류 심을 작정이어서 여유 있게 했더니 어느 해보다 큰 마늘밭이 되었습니다.

“근데 밭 가는 정리가 하나도 안 됐네. 빨리해.” 내년 얼음 풀리면 하면 된다고 하자 아내가 정색합니다. “안 돼. 그때는 밭 안쪽 돌보기도 바쁘잖아.” 맞는 말입니다. 모든 열매가 껍질로 그 안을 보호하듯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자리가 없으면 고갱이도 없는 것입니다. 아내가 널찍하게 가장자리를 정하고 예초기, 톱, 삽 다 동원해서 고르자고 합니다. 내친김에 가장자리의 끄트머리가 되는 고랑 청소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둔덕에 올라 어림잡아 보니까 다가올 11월 한 달은 돌아가며 밭마다 가장자리 작업을 하게 생겼습니다.“양파 물 좀 주지? 근데 가생이가 잘 마르니까 신경 써서 줘야 해.”가장자리보다‘가생이’가 더 정겹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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