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가 사는 고장에는 마을 이름 끝에 ‘-실’이 붙는 곳이 많습니다. 덤바우가 속해있는 우리 마을도 ‘-실’ 입니다. 마을 이름은 흔히 ‘-골’ 이나 ‘-말’ 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좀 의아했습니다.

마을 어르신한테 여쭈었더니 그냥 ‘-슬’ 이지 하며 허허 웃으시더군요. 실이 아니라 슬이라고 하시더군요. 알고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붙인 들이나 산 계곡의 지명, 속칭은 사람에 따라 발음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덤바우도‘든바우’,‘돈바우’,‘덤바구’등등 발음이 마을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달랐습니다.

한번은 정색하고 제대로 철자를 맞추어 알려달라고 몇 분께 물었더니 한결같이 ‘그걸 어찌 아누?’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엉터리라고 했더니 또한 한결같이 역정을 내며 ‘대충 다 알아먹어!‘ 하며 오히려 저를 타박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마을 분들끼리 저 뒷산 어딘가의 계곡 위치를 두고 이름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실’ 과 ‘-골’ 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던 저는 이리저리 뒤져 ‘-골’ 은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을 이르고 ‘-실’ 은 골짜기를 따라 집들이 줄지어 마을 이루면 붙는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찾았습니다. 실제로 우리 마을에서 집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골짜기를 따라 줄지어 있으니 맞는 설명이었습니다. 실이 붙은 다른 마을도 역시 그런 지형이었습니다.

“바깥사람 티 내는 거지, 그게 다.” 마을 사람에게 알은체하기라도 할까 봐 아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농촌 마을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사람들은 대개 절대적 위상을 가지고 사리판단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도 덤바우에 오래 살며 그런 느낌을 알게 됩니다. 상대적이거나 비교 대상의 존재가 아닌 독보적인 존재인 셈입니다. 그러니 사는 곳이 실, 골로 불리는 것이나 뒷산의 지명 따위는 대상이 아니라 뼈와 살에 생생히 무르녹아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런 사례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판장에서의 일이었는데요. 포도 낙찰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농민이 포도 수백 상자를 상차 해주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차에 싣던 모습입니다. 낮은 가격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으나 그분에게는 농민의 특유한 단독자의 아우라가 있었던 것이죠.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농작물을 기르는 일은 다른 어떤 것을 기르는 일과 달라 밭과 주변 환경 모두를 아우르는 권위를 가져야만 합니다. 이 권위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 통찰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미욱하고 어설퍼 보일 수는 있어도 그러한 품성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저 사진에 등장하는 이는 객지로 나가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조기 은퇴하고 마을로 돌아온 비교적 젊은 농민입니다. 몇 년 전 그가 돌아와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저 친구 다시 농사짓자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 라고 아내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런 소리 말라며 어린 시절 마을에서 자라며 어른들로부터 체득한 경험은 각인된 것들이어서 이내 다시 숨쉬기 시작할 거라고 하더군요. 과연 그렇더군요. 그에게 사무친 농사 유전자에 질투가 나 배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농민들은 자신의 경작지를 작은 나라 삼아 왕으로 군림하고 또 봉사합니다. 어쩌다가 농민에게서 비타협적인 자존심을 읽게 된다면 그가 왕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옳습니다. 저 사진 속의 젊은 농민을 먼 데서 바라보며 인사를 나누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함께 할 일이 생기면 좋은데.” 어려운지 알면서도 아내가 보기 좋아서 하는 말입니다. 남은 평생 농사지어도 우리 부부는 유전자는커녕 굳은살 따라잡기도 엄두를 낼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안타깝고 억울한 일입니다.

“이제 돌아올 사람도 드문 마을이야. 영 떠나는 노인 농민들도 자꾸 늘어나고.”  왕자들이 없으니 왕위를 이을 사람 없고, 적통을 이어받지 못한 우리 부부는 그저 애달프군요. 그러니 남은 왕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게 최선일 테지요.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