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립니다. 제법 소리가 굵습니다. 비 오기 시작하고 깼는지 깨고 나서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내더러 도적처럼 비가 올 거라고 내내 얘기했는데 정말 밤손님으로 와 내리는군요. 소리 굵기를 가늠해봅니다.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농막 지붕에서 추녀를 거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의 박자 세기도 따져봅니다. 시간당 2mm 정도군요. 그걸 가늠할 수 있냐고요? 물론 못합니다. 거짓말이죠.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비여서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싱긋이 웃습니다.

제 농담에 겨워 짓는 웃음이 아닙니다. 개울물이 거의 말라 호스를 통과해 나오는 물의 세기가 너무 약해서 밭 오르막에 받쳐둔 5백 리터들이 물통까지 올라가지 못했거든요. 아래턱에 낮은 물통을 대어 놓고 그 물통이 가득 찰 때마다 양동이로 큰 물통까지 퍼 올려야 했습니다. 진력이 나고 힘도 들어 짜증이 나다가 나중에는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혹독한 가뭄인데도 기어이 마르지 않은 개울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당분간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니 웃음이 나올 밖에요.


 제법 굵은 빗소리가 한참 이어지는데도 아내는 깨지 않습니다. “이럴 때 김매야 해. 비라도 오면 아주 산발을 하고 올라올 거야.” 어제 이러며 뙤약볕에서 바싹 마른 풀하고 씨름을 하더니 곤했던 모양입니다.

비가 왔으니 또 이러겠습니다. “물 먹어서 흙이 헐거울 때 해야 힘이 들지 않거든.” 귀한 손님을 반가워하겠으나 깨우지 않기로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금세 심심해집니다. 더 잠자기는 그른 것 같은데 행여 아내가 깰까봐 불을 켤 수도, 커피라도 한잔 끓일 수도 없군요. 깜깜한 어둠에 대고 눈만 껌벅거리다가 문득 아내를 두 번째 만났을 때가 생각납니다.

아내와 저의 두 번째 만남은 어느 전철역 3번 출구 계단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내가 퇴근할 즈음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별로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는데 다행히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이 맞구나.’ 아내를 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느낌에 아내도 그리 느낀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아내와의 만남으로 어떤 허물을 벗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만날수록 왠지 개운하고 후련한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아내는 제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풍선 같았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 다 워낙 나이 들어 만난 사이라 살아온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앙금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어둠일 수도 있고, 흙에 빗대면 경반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단단한 바닥을 이룬 것 말입니다. 그렇게 단단한 서로의 어둠을 두드려 없던 문을 만들다 보니까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옛 생각을 하려고 옆으로 돌아눕는데 아내가 소리를 꽥 지릅니다.

“왜 안 깨웠어?” 그러더니 속사포처럼 읊는군요. 말리려고 널어놓은 감나무 잎 걷어라, 마당에 내놓은 공구함 치워라, 참깨모종판 차광막 안으로 옮겨 놔라, 고양이 밥통도 치워라, 등등.


 비를 철철 맞아가며 우왕좌왕 하다가 또 웃음이 납니다. 빗소리에 옛 낭만이나 즐길 줄 알지 참깨모종 완전히 망쳐버릴 걱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제가 한심해서요. 그래도 아내가 괘씸해서 한마디 했습니다. “아니, 같이 했으면 금세 끝났겠네.” “난 잠이 덜 깼잖아.” 돌이켜 보면 아내는 절대로 얄미운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막말로 얌통머리 없는 사람은 난데 아내가 배운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겨우 문을 내고 나서 안 좋은 품성만 공유한 걸까요?

“흥, 나한테 못된 구석이 뭐라도 있기나 해?” 아내는 여전히 이불을 감싸 안고 앉아서 저를 놀립니다. “내가 따져볼까?” “야밤에 따지기는 뭘 따져. 커피나 끓여와, 비도 오는데.” 비 맞으며 일한 사람도 있는데 커피라도 끓이는 게 예의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돌아온 답이 이렇습니다. “새벽부터 바쁘겠네. 호박 남은 거 다 심고, 고추 줄띄우고, 댁은 2차 토마토 밭 마무리 하면 되겠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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