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먼동이 틀 무렵 아내가 일어나는 기척입니다. 주섬주섬 옷을 갖추어 입더니 슬며시 농막 문을 열고 나섭니다. 저를 깨우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뒤끝은 조금 서운하군요. 아마도 아내는 농막 뒤편 밭과 개울 사이 비탈길을 자분자분 밟아가고 있을 겁니다.

장화는 밤사이 내린 이슬에 금세 젖었겠습니다. 한 짝이 찢어져 물이 새는 장화입니다. 진작 사둔 것으로 바꿔 신으라고 하면“나머지 한 짝은 멀쩡하잖아, 아까워.”라고 대답하는 게 벌써 몇 개월째입니다. 산을 가로 타면서 개울을 몇 번 건너야 하는데 무람없이 디디다가 한쪽 발이 푹 젖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 장화가 새는지는 모르겠군요.


해마다 이맘때면 아내가 하는 고사리 산행인데 첫걸음은 지금처럼 홀로 살짝 다녀옵니다. 무슨 의식 같습니다. 오래전에는 더 굵고 더 많은 고사리를 찾아 마구잡이로 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오로지 채취가 목적이었던 셈입니다. 고사리가 가득 차 풍선처럼 부푼 배낭을 메고 혹시 모른다며 가져갔던 보자기에도 한가득 담아 돌아오던 개선장군 같은 아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서 물 끓이라고 고사리 다 쇠겠다고 호들갑 떨며 짓던 함박웃음이 보기 좋았습니다.

제가 고사리를 삶는 사이 아내는 덤으로 데려온 붓꽃이나 정체 모를 알뿌리를 서둘러 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아내의 나물 산행이 요즘은 간결해졌습니다. 거리와 시간이 짧아졌고, 열망도 뜨겁지 않습니다. 이제 고사리도 심드렁해진 것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담담한 거지, 고라니처럼.”담담해졌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고라니를 왜 들먹거리냐고 재우쳐 물으면 또 이렇게 답합니다.


“산의 식구가 된 거다, 이 말이야. 댁은 잘 모르겠지만.”꼭 나를 걸고넘어져야 하냐고 항의하면 더불어 사는 것에 의욕이 없는 사람 아니냐고 딴지를 겁니다. 그게 아니라 관조하는 것이라고 제가 눙치면, 성의가 없다고 타박합니다. 


아내의 귀환을 어림잡아 저는 커피 물을 올려놓고 모종 덮었던 이불을 걷었습니다. 아침 기온이 좀 낮기는 해도 이제는 고추가 꽤 자라서 볕 받으며 찬 바람을 쐬는 것도 좋겠군요. 고추보다 늦게 씨를 넣었는데도 토마토가 이내 심어야 할 만큼 자랐습니다. 두어 종류는 끝내 싹을 틔우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귀한 종자가 그리되어 아내 실망이 큽니다. 당장 구할 데도 없으니 훗날을 기약합니다.“씨를 잘못 심었거나 물을 제대로 안 줘서 그래.” 공교롭게도 그놈들은 제가 파종했군요.“다행이네, 댁이 심었으면 매일 가슴을 쳤겠네.”요즘 터득한 우회 전략입니다. 남편 탓으로 돌리고 잊는 게 편하다는 아내의 심리는 환영합니다만, 고분고분 넘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우회 전략이 아내의 약을 더 올리는 구실을 합니다. “똑바로 좀 햇!”아내가 이렇게 외마디를 지르면 한가지 고민을 해결했다는 신호이므로 저도 안심합니다. 무수히도 많은 자잘한 사건, 사고에 치이는 게 사람 사는 일인데요. 그중에 농사는 바람 잘 날 없습니다. 더 기다렸다가 물을 주면 되겠다 싶어 비닐하우스를 나서는데 먼발치에 나타난 아내가 저를 부릅니다. 일찌감치 내려왔군요. 해를 등지고 선 아내의 실루엣이 우뚝 선 나무처럼 보입니다.


종교인들에게 성지순례는 무척 소중한 의의가 있다고 하더군요. 신앙을 확인하고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할 뿐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는 상징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아내가‘산이 부른다’고 외치며 연두색으로 물드는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의식의 폭과 깊이를 종교에 견줄 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덤바우를 터전으로 삼아 사는 우리 부부에게는 어쩌다가 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는 것도 범상치 않습니다.

“누가 다 꺾어갔네요! 아내가 다짜고짜 짜증을 냅니다. 임자 없는 고사리 도둑질당했다고 투덜대는군요. 아내의 산행에 덕지덕지 의미를 부여하던 제 생각이 화들짝 깹니다. 말이 험하다고 힐난했더니 일 년을 기다렸는데 헛걸음했다며 여전히 분을 이기지 못하는군요. 아내의 이런 성스럽지 못한 뒷산 순례가 외려 반갑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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