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다 보면 자괴감 들 때가 있다. 학교 급식으로 보낸 오이가 되돌아 왔다. 이슬이 채 마르기 전, 아침부터 수확한 오이를 잘 생긴 놈만 골라 상자에 담아 보낸 오이가 통째로 반품되어 온 것이다. 이유는 오이가 굽었다는 것이다.

어느 해 파프리카를 재배하였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역 유기농 매장에서 연락이 왔다. 유기재배 파프리카를 판매하고 싶다고 해서 파프리카 몇 상자를 보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토경 유기재배 파프리카는 구하기 어렵고 귀했다.

며칠 후 매장에서 연락이 왔다. 파프리카에 벌레 구멍이 있고 파프리카 크기가 작아서 팔기 어려우니 반품하겠다는 것이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말 없이 매장으로 가서 파프리카 전부를 되가져왔다.


지난 20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이런 유사한 일들을 종종 겪었다. 유통업체나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나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기 농산물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소비시장의 현실을 대할 때 마다 자괴감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2019년 겨울이었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소뿔농장과 인연을 맺어오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극히 일상적인 친교의 자리였다. 소설가, 사진작가, 의사, 요리사, 교사, 공무원, 프리랜서 등 모인 사람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자연스럽게 농장을 소개하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별총총 달휘영청 소뿔농장이라는 긴 농장 이름에 담긴 의미와 우리 두 내외가 꿈꾸고 있는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농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농장에서 키우는 닭, 개, 오리, 고양이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이들이 우리 농장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명대로 살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 간 동물들의 공동무덤도 소개했다. 우리 농장의 농사 철학이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되는 현실이 답답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날 이후, 누군가의 제안으로 소뿔농장을 지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소뿔농장의 농사 철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별회원, 달회원, 소뿔회원이 되어 새롭게 우리 농장과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소뿔농장 패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패거리는 소뿔농장에 대해서는 표시가 날 정도로 편파적이고 편애를 한다. 회원들은 일 년치 회비를 선납하였다.

소뿔농장의 꿈과 철학을 실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과 함께 회비의 사용처는 전적으로 소뿔농장에게 맡긴다고 했다. 우리는 패거리들에게 단순 회원이 아니라 소뿔농장 공동 농장주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소뿔농장 공동농장주 24가족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뿔농장과 함께 하고 있다. 농장에서 치유사진을 찍고 공연을 하고 요리를 하고 때로는 농사 일을 같이 한다.


소뿔농장에서는 회원들에게 매달 채소 꾸러미를 보낸다. 제철 채소와 허브, 계란, 직접 로스팅한 원두커피, 농장에서 만든 가공품이 꾸러미의 구성이다. 소뿔농장 채소 꾸러미를 보내고 나면 온라인 공간에 회원들의 글과 사진이 올라온다.

소뿔농장 채소로 요리한 사진, 채소 이름을 묻는 질문, 채소에 붙어서 온 달팽이를 산책길에 안전하게 놓아 준 이야기, 소뿔농장에서 온 고추벌레를 아이들이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소뿔마을, 누가 일부러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데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이 공간을 소뿔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채소 꾸러미를 보낸 후 소뿔마을은 이야기로 넘쳐난다.


소뿔농장 채소 꾸러미는 반품이 없다. 심지어 채소에 묻어 간 벌레도 소뿔마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만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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