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서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눈이 내렸습니다. 펑펑 내리는 걸 보다가 누웠는데, 몇 년 전처럼 폭설이 되지나 않을까 해서 쉬 잠들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 아침에는 온기가 도는 맑은 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쌓였던 눈이 양지바른 곳에서부터 순식간에 녹자 오히려 야속했습니다.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설을 즐기고 싶었나 봅니다. 아쉬우나마 오전에는 희끗희끗한 산과 들, 밭 언저리를 볼 수 있어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아내 표현에 따르면, 밤새 내린 눈이 지난겨울이 올봄에 남기는 편지라는군요. 대체로 산문적인 아내가 시적인 말을 다 할 때가 있다 싶어 내용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실용문에 가까운 답이 돌아옵니다.
“열심히 살아라.”
봄눈에 빗대 저한테 내리는 아내의 격문에 가까운 발언이군요.
“우리 사이에 무슨 낭만이 있겠냐?”
일이나 하라는 아내에게 한마디 하고 돌아서 감자밭으로 가는 길에 보았습니다. 광대나물꽃. 식물도감에는 4~5월에 피는 꽃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어쩐 일인지 저 사는 덤바우에서는 3월 중순만 되면 저렇게 붉은 자줏빛 꽃이 핍니다. 두해살이 풀이라는데 제가 방금 발견한 바로 그 자리에서 광대나물꽃이 매년 거르지 않고 피어나니 신기할 뿐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는 안타까웠습니다. 눈이 녹기 전에 보았더라면 꽃 색깔이 더 선연했을 텐데 말입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찍어두었던 광대나물꽃 사진을 넌지시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아내가 감탄합니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눈을 배경으로 핀 광대나물꽃이었습니다. 제가 찍기 전, 그러니까 눈이 소복히 쌓였을 때의 사진이었습니다.
“아니, 같이 보자고 하면 안 되나?!”
제가 역정을 내자 아내는 태연히 “지금 보여주잖아.”라고 대꾸하는군요.
아내와 제가 처음 덤바우에 왔을 때는 들꽃이나 산꽃의 이름을 잘 몰랐습니다. 이름은커녕 산과 들을 쏘다녀도 꽃이 피어있는지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들풀을 조금씩 알아가자 우리 부부에게 각별한 즐거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경쟁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시샘이 되기도 했으며, 말다툼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래전입니다만, 아내가 고사리 꺾으러 홀로 뒷산에 갔다가 홀아비꽃대 군락을 발견했다고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찍어온 사진이라도 보여달라니까 짐짓 직접 가서 알현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뵈달라고 떼를 쓸수록 어깃장만 부리는 아내가 얄미워 발견한 장소를 대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내는 열심히 그 장소를 설명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뒷산 어느 한구석을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번연히 아는 아내가 자신이 잊지 않기 위해 새겨보자는 것이지 제게 친절히 알려주겠다는 의도가 있을 리는 없는 것이죠. 설명 끝에 아내는 다음 날 같이 가보자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장 뒷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초입까지는 제대로 길을 잡은 것 같았는데, 금세 뒤죽박죽이 되어 이리저리 헤매게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만 악착같았지 거기가 거기 같아서 홀아비꽃대는 그 그림자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산제비꽃을 만났습니다. 산기슭 두텁게 낙엽이 쌓인 틈에 하얗게 꽃대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꽃은 제비꽃과 같은데, 잎 모양은 넓적한 풀입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사진을 찍은 다음 한달음에 우리 밭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내에게 다짜고짜 사진을 내밀었습니다. 적어도 덤바우 언저리에서는 희귀한 발견이라 아내도 놀랍고 반가운 눈치였습니다.
“어디서 봤어?” “음, 그러니까 호두밭 지나서...음...?” “그냥 모른다고 하시지?” “응, 몰라.” 그때 보았던 남산제비꽃은 지금껏 다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대꽃 피는 요즘 우리 할 일이 뭔지는 알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밭 갈아야 할 사람이 꽃타령 할 때가 아니거든. 그냥 보이면 보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안 그래?” 아내 말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봄은 일 년에 단 한 번, 꽃이 가장 화려한 계절입니다. 훌훌 털고 꽃구경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