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이 없습니다.”
어느 해인가, 6월경 고추가 이상해서 증상을 살펴 전문가에게 문의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바이러스 감염에는 대응할 약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염된 고추는 뽑아내고, 멀쩡한 고추에는 양분을 공급하여 면역력을 높여주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상태를 보시고는 ‘망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막무가내로 유기농에 도전한 탓에 다양한 병충해를 겪어온 우리 부부이지만, 바이러스 창궐에는 한마디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같은 간격으로 일렬로 곧게 서서 하얗게 꽃을 피우던 고추가 하나, 둘 시르죽어 나가 하루에도 몇 주씩 뽑아내야 했습니다.


멀쩡한 것과 병이 갓 든 것을 가려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남는 것 없이 밑지는, 일 아닌 일을 매일 하다 보니 농사가 고달프기만 했습니다. 듬성듬성 고추 성긴 밭을 보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내도 저와 다르지 않아, 아니 넋 놓고 퍼질러 앉아 고추를 바라보며 자라는 양을 대견하게 바라보곤 하던 아내이므로 저보다 훨씬 더 속이 쓰리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미 든 병은 어쩔 수 없다 치고 병이 안 들게 하거나 들어도 쉬 낫거나 살짝 생채기나 나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방책을 자료를 뒤져 찾아보았더니 비결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토양 상태가 좋아야 하고, 어린 고추들이 이른 봄의 높은 일교차에 충격을 받지 않게 해야 하며, 진딧물이나 총채벌레가 만연하지 않도록 방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이러스가 순순히 비켜 가지는 않겠으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첩경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대비를 단단히 한 덕인지 그 후 몇 해 동안 바이러스가 잠잠했습니다. 토양과 고추를 모두 건강하게 잘 돌본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그런 자만심을 비웃기나 하듯 다시 엄습했습니다.


“제대로 했어야지.”
두 번째 바이러스 내습이 있자 대뜸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게 책임을 묻는다기보다는 방심했다는 자책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도맡아 하는 거름주기, 방제하기 등을 충실히 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아내의 일인 모종 키우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고추가 싹수부터 부실했던 탓이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처음 당했을 때와는 달리 처방전이 있다고 굳게 믿었던 아내와 저는 서로를 의심하고 질책했습니다.


바이러스에 오그라든 고추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말다툼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바이러스 출현은 몇 가지 환경을 개선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워낙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땅과 작물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유지하며 겪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차분하면 괜한 감정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을 아내와 저는 꽤 토닥거렸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눈이나 비가 많이 내려 이런저런 피해를 보았을 때조차도 아내와 저는 상대 탓을 했던 적이 많습니다. 좋게 보아 농사에 애면글면 애착이 많아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원인은 딴 데 있는데 곁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고약한 습성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손바닥만 한 밭에서 벌어지는 부부지간의 자책과 책임 전가, 자괴감 등등은 소소한 기쁨으로 금세 상쇄되는 것이어서 말 그대로 칼로 물 베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를 위협하는 ‘신종코로나19’의 창궐은 이미 끔찍한 재앙입니다. 바이러스 극복과정에서 두려움 때문에 서로 반목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새겨둘 만한 성경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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