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내는 씨앗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채소만 해도 50 여종 이상의 종자를 선정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우리 부부가 다루는 씨앗들은 토종, 재래종, 고정종, 개량종 등 다양합니다. 이파리를 먹는 엽채류는 최근 들어 그 종류가 대폭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많은 종자회사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을 일일이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이 훌쩍 지납니다. 맛과 영양 면에서 기능성을 자랑하는 새 종자들은 재배경험이 없어 관련 자료를 찾아봐야 하므로 선택의 시각은 더욱 더뎌집니다.
 
거의 한 달을 끙끙대고 나서야 아내는 겨우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밥 좀 하지 그랬어?” 저는 저대로 바빠 컴퓨터 앞에서 끙끙대고 있던 차였으나 뜨끔합니다. 요리는 젬병이라도 밥 안치는 것쯤은 곧잘 하는데 말입니다.
“계란 프라이는 반숙으로, 나보다 잘 하잖아.”
종자들 목록 작성했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필요한 씨앗 종류의 세 배수에 이르는 항목을 지워나가는 것은 추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그 일을 하라고 이르고는 주섬주섬 일어나 부엌으로 갔습니다. 설거지를 시작으로 밥에 이어 계란 프라이까지 마치자 아내가 돋보기너머로 저를 보며 대견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심이라도 베푼 사람의 너그러운 미소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그러자마자 다시 한 번 뜨끔합니다.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항상 부엌일을 도맡아 온 아내입니다. 교대로는 못할망정 조금씩이라도 거들기로 내심 작정했던 터인데도 못된 관성이 여전한 모양입니다.
 
아내가 씨앗 선정에서 가장 애를 먹는 대목은 토종입니다. 예를 들어 토종상추는 종류가 다양한 데 비해 수확기간이 너무 짧고, 맛 또한 금세 쓴 맛이 강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어서 선택을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토종 호박이나 오이, 참외, 고추 등은 채종과 선발과정에서 교잡이 된 것들이 상당수 있어 기대하는 수확에 미치지 못 하는 일도 잦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내는 토종씨앗을 방바닥에 빼곡히 늘어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합니다. 십여 년 이상 우리 부부가 재배해온 토종고추, 수비초는 안타깝게도 선발육종에 거의 실패한 것 같습니다.
 
3년 전부터 교잡현상이 두드러져 종자 일부를 다른 농가에 의탁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자가채종의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탓입니다. 아내가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걸 지켜보는 저 또한 긴장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토종 생강 심을까, 말까?” 아내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제게 묻습니다.
“하지 말자.”
“하고 싶은데...”
그렇게 백화점식으로 무작정 심다가는 뒷수습이 안 될게 빤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저는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대신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내도 따라 웃는군요. 올 농사의 품목을 정하는 결정적인 순간,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것이죠. 아내는 이런저런 미련을 털어내듯 씨앗목록에 빗금을 쳐가며 올해 포기할 씨앗들을 지워나갑니다.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되는 순간이라 저도 숨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결국 아내는 선정 작업을 마저 마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으므로 굳이 서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 “근데 말이야. 싹 트는 걸 보면 씨앗에서 날개가 돋는 것 같지 않아?”
아내가 기지개를 켜며 이렇게 말합니다. 문득 아내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어머. 그럼, 나 선녀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거야? 당신은 불쌍한 나무꾼이 되고? 호호.”
활짝 웃으며 아내가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켭니다. 저도 따라서 기지개를 켜보았습니다. 등줄기가 저릿해지면서 열기가 얼굴로 불끈 올라옵니다.
씨앗이 최초로 태동하며 일으키는 날갯짓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아내 또한 덤바우에서 훨훨 나는 새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우리 부부의 덤바우 농업이 글자 그대로 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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