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20년째 농사짓는 나를 부를 때 여러 호칭을 붙인다. 농장에 찾아오는 농자재 영업사원들은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말끝마다 이어지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부담스럽지만 딱히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기에 그냥 받아 넘긴다. 소비자 생협 모임에서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과분하여 누구누구 씨라는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농사를 짓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라는데야 어찌할 수 없다. 역시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농장 체험을 오는 이들은 나를 ‘서농부님’이라고 부른다. 이것 역시 익숙한 호칭은 아니지만 사장님이나 선생님보다는 덜 어색하여 이제는 그럭저럭 친숙한 호칭으로 다가온다.       


내가 때에 따라 사장님이나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과 상관없이 농사를 짓다보면 나의 신분을 제도에 맞게, 법적으로 증명해야만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농협 조합원으로 가입할 때가 그렇고, 농업 면세유를 신청할 때가 그렇다. 농민들이 모여 영농조합 법인을 설립할 때가 그렇고, 정부의 영농 관련 지원 사업을 신청할 때가 그렇다. 위의 일들을 처리하자면 내가 농민임을 반드시 증명해야만 하다. 농민이 아니면 신청 자격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면사무소에서 ‘농지원부’를 발급받고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농업경영체등록증’을 발급받아서 제출한다. 이것으로 농민 입증 완료다. 

내가 아는 그녀는 몇 해 전에 귀농했다. 식물을 관찰하고 동물을 보살피는 일을 좋아했던 그녀는 귀농을 하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주위에서는 그녀를 ‘청년 여성 귀농인’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호칭을 붙여서 불렀다. 현재 농촌 현실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청년, 여성, 귀농이라는 혹을 몇 개나 달고 농촌 생활을 해야 한다. 보기에 따라 청년, 여성, 귀농이라는 호칭이 호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곧 떼어내고 싶은 혹이 될 게 뻔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귀농 사건에 대해 축하를 보내며 용기를 북돋우는 말보다는 측은한 생각부터 들었다. 마침 정부에서 청년농민을 위한 해외 농업연수가 있어서 참가해보라고 권유했다. 농사를 좋아하는 것과 농사로 생계를 꾸리는 것은 크게 다를 수 있으니 두루 견문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는 충고도 보탰다.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해외연수 참가를 신청하였지만 그녀의 신청서는 반려되었다. 그녀가 농민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외연수 참가 신청자 중에서 이런 이유로 신청이 반려된 경우가 몇 건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농지원부나 농업경영체등록증에 가족 구성원 또는 부양가족으로 되어 있거나 농지원부나 농업경영체등록증이 아예 없는 경우였다. 이런 이유로 제출한 신청서가 모두 되돌아 왔다. 주위에서는 이들을 ‘청년 여성 귀농인’으로 부르는데 아직 법적으로 농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출국 준비를 하던 그녀는 다음 기회에 참가하겠다며 애써 웃었지만,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진짜 농민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법적으로 땅 1천 제곱미터 이상을 경작하는 자, 농산물 판매액이 120만 원 이상이 되는 자,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자하는 자, 영농조합 법인이나 농업회사 법인에 1년 이상 고용된 자를 농민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해 주었다. 법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을 전하면서 나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을 이장의 자필 서명 보증으로 해외 연수에 참가는 하였지만 그녀의 청년 여성 귀농인으로서의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요즘 전국적으로 농민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농업, 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으로 농민기본소득제도를 실시하여 몰락하는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자는 대안 정책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농민기본소득제 도입을 위한 토론회가 몇 번 열렸다. 토론이 한창 무르익어갈 때 한 여성 농민이 발언하였다. 농민기본소득제도에서 여성 농민이 배제되었다.  본래의 취지대로라면 개별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농가 단위로 지급하는 것은 여성 농민을 배제하는 것이다. 원래 취지에 맞게 농민 개개인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여성농민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론회 장이 잠시 술렁거렸다. 주최 측은 여성 농민들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우선 농가 중심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농민의 권리도 보장되는 방향으로 제도를 단계적으로 수정해 나가자고 선언적 결론으로 끝냈다.


농민의 절반은 여성 농민이다. 곳곳에서 그녀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농촌 문화의 오래된 차별적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평등의 소리로 들린다. 그녀들도 농민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요구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불만을 묻어둔 채 어떻게 농업, 농촌 농민을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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